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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나의 장례식에 초대받았다
 
지은이 : 헬렌 듀런트 (지은이), 황성연 (옮긴이)
출판사 : 서사원
출판일 : 2026년 03월



  • 발신인 없는 초대장 한 통이 도착한다. 내용은 단 한 줄, 장례식에 와달라는 것. 누가, 왜 보낸 것인지 알 수 없다. 호화로운 부촌에서 가장 비싼 것들로 치러지는 장례식에는 묘하게 날이 선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이방인이 나를 흘긋거리며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적대시한다. 고인의 이름만 확인한 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뜨려고 무덤에 가까이 다가간 순간, 숨이 막혀온다. 관에 새겨진 이름, ‘앨리스 앤더슨’. 나의 이름이다.



    나를 위한 장례식

    나는 지난 삼 년 동안, 누군가가 나를 알아볼까 두려워 사람들을 피해 숨죽이며 살아왔다. 하지만 오늘은 상황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나는 장례식에 초대받았다. 솔직하게 말해 돈만 있다면 쇼핑을 하러 가거나 멋진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지, 이런 침울한 자리에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한데 내게는 돈이 없다. 그게 내가 오늘, 정체가 발각될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온 이유다. 장례식장은 내가 사는 곳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어,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제발, 그러기를.

    보통 이런 자리에는 고인과 친분이 있어야 올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초대장은 이메일로 왔는데,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눈에 띄지 않게 살아왔고, 이메일은 몇 달 동안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주소를 아는 사람은 한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익명으로 보내온 이메일에는 보낸 사람의 단서도, 고인의 이름도 없었다. 그 초대장이 일종의 사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요청하는 답장을 보냈지만, 메일은 곧바로 반송되었다.

    수상한 이메일인 만큼 삭제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정체불명의 발신자가 고인이 나를 아꼈고, 내게 무언가를 남겼다고 적었기 때문이다. 그게 돈이기를 바랐다.

    내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이라는 유혹이 너무나도 강해서 숨어 지내던 생활을 끝내기로 마음 먹었다.

    목사의 설교가 끝나자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를 떴다. 다과회는 무슨. 어차피 내가 사라진 걸 눈치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저들과 같은 부류가 아니다. 하지만 고인의 이름만큼은 알아야겠다. 누군가 묻는다면 대답해야 하고, 나 또한 그녀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무덤 가까이 다가가 관이 땅속으로 영원히 묻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늘 내가 이곳에 초대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장례식의 주인공은 바로 나다. 새하얀 관 위, 황금색 명패에 큰 글씨로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앨리스 앤더슨’

    바로 나다.

    “얼굴이 창백한데, 괜찮으세요?”

    남자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들어본 적 있는 중후하고 매력적인 목소리. 장례식에서 만난 정장 입은 남자다.

    “다과회는 앨리스가 살던 집에서 열립니다. 원하시면 제 차로 태워다 드릴게요.”
    “그래 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주소를 몰라서요.”
    “맥스 마스덴입니다. 앨리스가 사망하기 전까지 그녀의 고용주였어요. 오늘 이 조촐한 장례는 제가 준비했습니다. 앨리스에겐 의지할 사람이 없거든요. 적어도 우리가 알기에는요. 그녀는 지난 이 년 동안 제 사무 보조원으로 일했고, 가끔 제 비서 역할도 했어요. 그러니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알고 지낸 사람이 없다는 점은 흥미로웠지만, 지금 가장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왜 내 이름을 사용했는지, 어떻게 나를 알았는지다.

    “우리 집으로 가겠어요? 앨리스는 우리와 함께 살았으니, 거긴 앨리스의 집이기도 합니다. 회사에서 제공한 일종의 혜택이죠.”

    운 좋은 앨리스. 나도 그런 직장을 구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도나 슬레이드예요.”
    “아내한테 가봐야겠어요. 분명 누군가 붙잡고 수다를 떨고 있을 겁니다. 제가 떼어 놓지 않으면 오후 내내 여기서 못 벗어날 거예요.” 그가 농담하듯 말했다. “먼저 타세요. 그동안 아내를 데리고 올게요.”

    오 분 정도 지나자 맥스 마스덴은 아내와 함께 돌아왔다. 그녀는 그의 팔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는데, 어찌나 세게 잡고 있는지 그의 팔이 뜯어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난 맥스의 아내, 타라예요.”

    아담하고 귀여운 여자였다. 그녀는 옆에 앉은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남편만큼이나 외모가 화려했는데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타라는 내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핸드백에서 작은 거울을 꺼내고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완벽하게 손질된 손톱으로 턱까지 오는 금발 머리를 매만졌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웨이터가 내게 작은 접시를 건네주며 카나페가 담긴 쟁반을 내밀었다. 짧은 미소로 감사를 표하며 하나를 집어 들었다. 크림치즈를 바르고 그린올리브를 얹은 것인데 너무 작아서 하나 더 집었다. 연어와 처음 보는 토핑이 얹어져 있는 것이었다. 여기는 내가 올 만한 곳이 아니었다. 나와 어울리지 않는 낯설고 어색한 세계다.

    “우리 초면이죠?”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뒤로 빗어 넘긴 금발 머리에 햇볕에 잘 그을린 피부를 한 거대한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큰 체격에 군더더기 없이 딱 맞게 떨어지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기성복이 아닌 게 분명했다.

    “니코라고 합니다. 당신은요?”

    “도나예요.” 이름을 말하고 나니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이어 갈 말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을 견디다 못해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예전에 앨리스를 알고 지냈어요. 아주 오래전에요.” 마치 죄를 고백하는 것처럼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실례지만, 무슨 일을 하시나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동네 구멍가게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말할까. 아니, 그건 내세울 만한 게 아니다. 그에게 잘 보이려는 것은 아니다. 지금 바라는 것은 니코가 나를 내버려두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러 가는 것뿐이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걸 말했고, 스스로 정한 원칙들도 모조리 어겼다. 아무래도 긴장한 탓일 거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딱히 하는 일은 없어요. 새로운 일을 계속 찾아보고 있는데, 아시잖아요. 요즘 상황이 어떤지.”
    “그러게요. 음, 내가 아는 사람이 좀 있어요. 명함을 드릴게요. 전화해서 내 이름만 대면 바로 일하라고 할 거예요. 정말이에요.”

    낯선 이들을 피하는 게 가장 안전한 상황임을 굳이 그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니코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명함들을 꺼내 고르기 시작했다.

    니코는 명함들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순수하게 도움을 주려는 것일 테고, 언젠가는 이 명함들이 필요해질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그가 음료를 가지러 간 사이 나는 손에 쥔 명함들을 살펴보았다. 그중 니코의 명함은 바로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소프트웨어 회사 이름이 적힌 명함이 있었다. 머리를 써야 하는 곳은 나와 맞지 않는다. 앵코츠에 있는 도매업체 명함은 그나마 취업할 수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명함을 본 순간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졌다. 내가 아주 잘 아는, 시내에 사무실을 운영하는 회사의 명함이었다. 오늘만 해도 벌써 두 번째다. 내 과거와 다시 마주하게 된 게.

    니코가 음료를 들고 돌아왔다. 나는 와인잔을 받아 든 다음 그에게 명함들을 되돌려주었다.

    불안에 떨게 한 명함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 사람 이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아요.” 무심한 척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고 애썼지만, 사실 단순한 호기심에서 나온 게 아니다.

    니코가 내 손에서 명함을 가져갔다.

    “아, 이건 잘못 줬네요. 이 회사는 없어졌어요.”
    “왜죠? 회사 사정이 안 좋아졌나요?”
    “앤드루 울펜덴이라는 사람이 운영하던 곳이었는데, 지금 많이 아파요. 예후도 좋지 않은가 봐요. 그래서 프랑스 남부에 있는 별장으로 거처를 옮겼어요.”

    웬만해서는 누구를 미워하지 않는 나지만, 앤드루 울펜덴만큼은 예외다. 그는 내가 알던 모든 사람이 돈이 필요할 때 찾던 사람이다. 나 역시 위험을 감수하고 그에게 손을 벌렸다. 울펜덴은 걱정하지 말라며, 원하는 만큼 빌려주겠다고 했지만, 욕심부리지 않고 꼭 필요한 만큼만 빌렸다. 수입이 있을 땐 상환에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가게에서 일하는 시간이 줄어들자 어떤 주에는 원금도 제대로 갚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때 나는 앤드루 울펜덴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는 이자에 이자를 붙였고, 협박은 갈수록 노골적으로 변했다. 내가 빌린 원금을 다 갚았는데도 그는 이자를 갚아야 한다고 했다. 이해할 수 없었고, 무서웠다. 뭔가 조처를 취해야만 했다. 내가 택한 방법은 이름을 바꾸고 은둔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누군가 이 상황을 본다면 극단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울펜덴 같은 남자가 당신의 뒤를 쫓고 있다면 이건 절대 과한 게 아니다. 그가 아프다니 안타깝긴 하지만, 일종의 인과응보라고 생각한다.

    니코가 울펜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알아야 했다. 그는 내 과거와 내가 이렇게 살아오게 된 이유를 잇는, 끊어 지지 않는 연결 고리였다. 오늘 하루 벌어진 기이한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니코를 만난 건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좀 더 불길한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일까.

    나와 니코가 대화하는 걸 본 타라는 우리 쪽으로 다가오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니코, 오랜만이에요. 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앨리스를 잘 알지도 못했을 텐데요.”
    “맥스가 연락했어요. 꽤 상심해 있더군요. 그래서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까 해서 왔죠.”
    “여긴 앨리스 친구 도나예요. 멀리서 보니 두 사람 꽤 대화가 잘 통하는 것 같던데.”
    “내가 도나를 받아줄 만한 회사 몇 군데를 추천했어요.”

    “일자리를 찾고 있어요?” 타라의 얼굴이 굳어진 채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타라는 니코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얼음처럼 차갑게 쳐다보며 말했다. “니코, 맥스와 나는 도나에게 일자리를 제안하려던 참이었어요.”

    “앨리스가 하던 일을 대신해야 한다면, 역시 앨리스와 가까웠던 사람이 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래서 우리는 도나가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해요.”

    이상한 논리였다. 경력도 보지 않고, 추천인도 없이 내게 일을 맡긴다고? 아니, 그보다 나한테 먼저 의사를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 당장 맥스에겐 새 비서가 필요해요. 당신이 이 일을 맡지 않으면 내일 인력 업체에 연락할 거예요. 그러면 몇 시간 내로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겠죠.”

    점점 더 거절하기 어려워졌다. 타라가 이 일을 맡기려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남은 선택지는 없었다. 이 일자리를 받아들여야만 앨리스 앤더슨의 정체도, 그녀의 장례식에 초대받은 이유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요. 할게요.”

    결국 타라가 원하는 대답을 던졌다. 이제부터 좋든 싫든 이 부부 밑에서 일해야 한다. 지금은 그저 올바른 결정을 내린 것이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딸이 한 명 있다고 했죠? 장례식에 참석했나요?”

    뭔가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기대에 그녀를 만나보고 싶었다. 타라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저었다.

    “한나는 장례식에 가지 않겠다고 했어요. 나이가 스물셋이지만, 철없는 십 대처럼 굴 때가 있어요. 사람들이 수군댈 게 뻔한데 오지 않은 건 좀 곤란했죠. 둘은 사이가 좋았어요. 앨리스는 한나의 재능을 알아보고 잘 이끌어 주었으니까요. 한나는 인근 마을에 카페를 차리는 게 꿈이었어요. 앨리스도 나도 그 아이의 꿈을 진심으로 응원했고, 시작할 수 있게 도와주려고 했어요. 그런데 한나가 혼자 힘으로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더라고요. 어리석은 생각이죠. 사업을 하려면 자본금이 있어야 하고, 그건 맥스에게 받아야 하는 데도요.”

    아직 그 아이를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잘 손질된 잔디밭 왼쪽 맨 끄트머리에 거친 땅이 눈에 띄었다. 그곳에는 큰 울타리와 헛간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었다. 입을 떼려는 순간 타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저기는 맥스의 공간이에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는 예전부터 돼지에 집착했어요. 돼지는 끔찍한 동물이에요. 더럽고, 땅을 파헤쳐서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잖아요. 그런데 그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돼지는 그 사람의 자랑이자 기쁨이죠.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저기 가서 시간을 보낸다니까요. 맥스가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싶을 땐 저 돼지우리부터 찾으면 돼요.” 타라가 한숨을 쉬었다. “맥스가 없을 땐 한나가 돼지를 돌봐요. 하지만 억지로 하는 거예요. 한나는 강아지, 고양이 같은 귀엽고 작은 동물을 좋아하거든요. 맥스의 관심사는 오로지 돼지뿐이에요. 다른 건 안중에도 없어요. 이 집으로 이사 오고 나서 단 며칠 만에 지긋지긋한 것들을 데려왔다니까요. 취향도 유별나지.”

    타라가 나가는 걸 확인하고 새 공간을 둘러보며 가구를 만져 보았다. 확신하건대 지금 나는 지을 수 있는 최고의 미소를 짓고 있을 거다. 너무 웃어서 바보 같은 표정일지도 모를 정도로, 장례식에 간 게 정말 ‘신의 한 수’였던 걸까.

    “마음에 들어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니 문가에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키가 크고, 뼈대 있는 퉁퉁한 체형에 긴 갈색 머리카락, 몇 주째 햇빛을 못 본 사람처럼 얼굴은 지나치게 창백했다. 눈은 놀랄 만큼 선명한, 마치 여름 하늘 같은 파란색이었는데, 예리한 사람이라는 게 단번에 느껴질 만큼 눈빛이 날카로웠다. 아마 이 애는 그 어떤 것도 놓치는 일이 없겠지. 이 여자애는 분명, 한나다.

    “다정한 부모님을 뒀구나.”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나의 시선이 벽에 걸린 야생화 그림으로 향했다.

    “여긴 앨리스 방이었어요. 타라가 당신에게 일을 제안했다면서요? 그럼, 이제 여긴 당신 차지겠네요.”

    한나는 마치 내가 이 방의 주인이 된 것이 규칙이라도 어긴 일인 양 말했다. 그림에서 시선을 뗀 그녀는 내 옆을 지나쳐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 이 일을 받아들일 생각이라면 약속해 줘요. 우리한테서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친구로 오랫동안 여기 남겠다고 약속해 줘요.”

    밝은 푸른빛 눈이 흐려졌고, 이내 입술을 떨었다. 이런 식으로 의지하는 것은 솔직히 조금 불편했다.

    “좋은 기회를 얻었는데 내가 왜 떠나겠어? 타라는 친절한 사람이야. 내게 일자리랑 살 곳도 줬는걸. 이걸 걷어차면 내가 바보지.”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언젠가는 여기 있게 된 걸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 지금은 타라가 마음에 들 수 있지만 나중엔 아닐 거예요. 내 말을 잊지 마요. 타라는 절대 함께 지내기 쉬운 사람이 아니에요.”

    한나가 사무실에서 나가자, 바닥에 어질러진 것들을 둘러보았다. 저건 나중에 치우자. 먼저 앨리스의 영역이었던 곳을 한 번 둘러보고 싶다. 캐비닛부터 바닥에 떨어지지 않은 것들까지. 책상 서랍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그 안에 개인적인 물건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팔을 쭉 뻗어 스트레칭을 했다. 그 순간 팔꿈치가 쌓여 있던 서류 더미를 쳤고, 서류는 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졌다. 속이 울렁거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렇게 덤벙거리다니. 바닥은 서류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아무도 보지 못했을 때 재빨리 서류를 주워 캐비닛에 넣으면 된다. 그래 봐야 이 작은 사무실이 깨끗하게 정리되진 않겠지만.

    이곳에 남아 일을 계속하고, 이 가족과 어울리고 싶다면 실수할 때마다 당황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의자를 옆으로 밀고 책상 밑으로 기어 들어가 흩어진 종이들을 주웠다. 정리를 끝내고 나서 점심을 먹어야지. 그때, 그것을 발견했다.

    책상 밑에 붙어 있는 그것은 내 이름이 적힌 USB 메모리 스틱이었다. 잠시 USB를 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앨리스가 숨겨둔 걸까? 그런 거라면 누구에게서 숨긴 걸까?

    나는 쭈그려 엎드린 채로 USB에 적힌 글씨를 읽었다. 빨간 매직으로 적힌 글자. ‘도나 슬레이드’ 불가능한 일이었다. 도나는 보이지 않는 존재다. 이 집에 있는 누구도 나를 몰라야 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알고 있다는 증거가 지금 떡하니 눈앞에 놓여 있다. 분명 이 USB는 내가 발견하게끔 의도적으로 숨겨진 것이었다. 손이 떨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