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바라보는 감각에는 유행과 무관한 어떤 지속성이 있다. 이 책은 19?20세기 영미권 여성 작가들이 정원과 숲, 농가와 호숫가에 머물며 포착한 자연의 리듬과 사유를 담은 산문 선집이다. 식물과 계절, 동물과 풍경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태도는 삶의 무게를 견디는 방식과 연결되고, 자연을 외부의 풍경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한다.
텍스트와 호흡을 맞춘 책 앞뒤의 그림들 역시 19세기 회화로, 산문의 시선과 정서를 시각적으로 확장한다. 도시적 속도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잊고 지냈던 감각을 회복하고, 자연을 새롭게 바라보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저자 로라 잉걸스 와일더 외
저자 로라 잉걸스 와일더는 ‘초원의 집(Little House on the Prairie)’ 시리즈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미국 개척 시대의 거친 자연 속에서 자라며 어릴 적부터 자주 이사를 다녔던 그녀의 글에는 그 시대의 들판과 숲에 자라던 들꽃이 자주 묘사된다. 이 책에 수록된 ‘들꽃 한 다발’은 저자가 쓴 짧은 수필로, 평생 그녀와 함께한 자연과 정원, 들꽃에 대한 애정이 섬세하게 드러나 있다.
■ 역자 강경이 외
역자 강경이는 영어교육과 비교문학을 공부한 뒤 좋은 책을 발굴해 소개하는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걷는 사람과 걷기에 관한 글을 즐겨 읽으며 삶 속에서도 걷기를 즐기려고 한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하염없이 걸어가는 여성에게 매혹되어 이 글을 우리말로 옮겼다. ‘우리의 이방인들’, ‘메리 커샛, 현대 여성을 그린 화가’, ‘불안의 변이’, ‘길고 긴 나무의 삶’, ‘천천히, 스미는’ 등 다수의 책을 번역했다.
■ 차례
목련나무 The magnolia tree / 마저리 키넌 롤링스 - 김정은 옮김
섬의 정원 An Island Garden / 셀리아 레이턴 색스터 - 정영은 옮김
1843년 6월 10일, 나이아가라에서 Niagara, June 10, 1843 / 사라 마가렛 풀러 - 김지혜 옮김
들꽃 한 다발 A Bouquet of Wild Flowers / 로라 잉걸스 와일더 - 최인 옮김
비가 드문 땅 The Land of Little Rain / 메리 헌터 오스틴 - 강경이 옮김
사건의 내막 The Ins and Outs of the Matter / 메이블 오스굿 라이트 - 고은주 옮김
숲속에서의 오후 An Afternoon in the Woods / 수전 페니모어 쿠퍼 - 최인 옮김
림버로스트의 나방들 Moths of the Limberlost / 진 스트래튼-포터 - 방진이 옮김
역자 후기
역자 소개
19?20세기 영미권 여성 작가들이 정원과 숲, 농가와 호숫가에 머물며 포착한 자연의 리듬과 사유를 담은 산문 선집. 식물과 계절, 동물과 풍경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태도는 삶의 무게를 견디는 방식과 연결되고, 자연을 외부의 풍경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한다.
자연 하는 마음
목련나무
나는 다른 영혼을 행복하게 하는 최소 조건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나 자신의 행복조차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나에게 필요불가결한 존재가 무엇인지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건 한 조각 하늘 아래 흔들리는 나무다. 언젠가 내가 불구가 된다고 해도, 병을 오래 앓거나 감옥에 갇혀 살아야 한다 해도 이 한 가지 자연의 증표만 있다면 나는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크로스크릭이라는 미국 플로리다주 벽지 마을에 처음 와서 낯선 날들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나무 한 그루 덕분이었다.
그 나무는 목련으로, 주변의 높이 뻗은 오렌지 나무들보다도 키가 컸다. 세상에 못생긴 나무가 어디 있으랴마는 태산 목련에는 특별한 완벽함이 있다. 목련은 주위가 얼마나 번잡하든, 주변 호랑가시나무, 참나무, 단풍나무가 얼마나 울창하게 자라든 상관없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성장한다. 그래서 나는 이 완벽함을 마주할 때마다 식물부터 인간까지 세상의 모든 존재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자신의 특성을 온전히 품고 있는 건 아닐지 궁금해진다.
또 목련나무는 이웃 나무들을 희생하면서 무자비하게 자라지 않는다. 목련은 오렌지 과수원 안에서 키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종 가운데 하나로, 애써 키운 오렌지 나무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지 않는다. 어린 목련은 또 얼마나 예의가 바른지 부모가 생을 다하기 전에는 그 자리를 넘보지 않는다. 늙은 목련나무 근처에서 어린 목련이 저절로 자라나는 경우는 결코 없으며, 늙은 나무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윤기 나는 새싹이 불쑥 솟아올라 족히 백여 년은 기다렸을 태양과 바람을 만끽한다.
활짝 핀 목련은 크기도 크고 꽃잎도 두껍지만 난초 꽃만큼이나 여려서 사람의 손길을 완강히 거부한다. 꽃잎 가장자리에 조금이라도 손길이 미치면 크림색 꽃잎이 단 한 시간 만에 축축한 갈색으로 변해버리므로 목련 가지를 잘라 화병에 꽂아두려면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조심히 다루기만 하면 목련은 나무에서처럼 집안에서도 꽃을 피운다. 찻잔 모양으로 오므라져 있던 꽃봉오리가 느닷없이 탁 터지고, 만개한 꽃에서 붉은 수술이 우수수 떨어진다. 고요한 방에 있으면 수술이 탁자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다. 익으면 촛불처럼 아름답게 붉어지는 목련나무의 열매는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에 조명이 차례로 켜지듯 꼭대기부터 아래로 천천히 익어간다.
삶의 침체기에 내게 자양분이 되어준 목련나무는 여전히 여기에 서 있고, 내가 지키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과수원 안을 걸을 때는 목련나무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 진가가 발휘되는 건 주방 싱크대 옆 서쪽 창문에서 밖을 내다보았을 때다. 창문 아래 테이블에서 파이 반죽을 하거나 케이크를 만들 때, 설거지를 하거나 채소를 다듬을 때면 마치 액자 속 그림처럼 높이 난 창틀 안으로 윤기 나는 짙은 초록빛 나뭇가지가 보인다. 태양이 그 뒤로 떨어질 때는 가지 사이로 빛이 뒤엉킨다. 크로스크릭에서의 일과 생활이 모두 낯설게만 느껴지던 날들에, 내려온 지 겨우 일 년 만에 이곳 생활에 지쳐버린 남편과 그의 두 형제가 마치 밑 빠진 독처럼 먹어대기만 하고 누구 하나 집안일을 도와주지 않던 그 날들에, 서쪽 창가에서 보내는 나의 시간은 끝도 없이 이어질 것처럼 막막하기만 했다. 그때마다 목련나무는 내게 아름다움과 위안을 전해주었다.
한번은 가족 중 한 사람이 오렌지 나무의 양분을 빼앗는다며 목련나무를 베어버리자고 한 적도 있었다. 다행히 다른 가족들이 말도 안 된다며 내 편을 들어주었고, 덕분에 목련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매일 수시로 변하는 하늘을 향해 나뭇잎과 꽃과 붉은 열매를 치켜들게 되었다. 오렌지 농사에서 비용을 보전하기조차 쉽지 않은 요즘, 우리는 목련나무가 과수나무에 이로운 다양한 기생생물을 품고 키워내는 감사한 존재라는 것을 안다. 나는 오랫동안 혼자였고, 목련나무는 지금도 여기에 서 있다.
우리 집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나오는 동쪽 과수원은 남쪽과 동쪽이 해먹으로 둘러싸여 있다. 마치 과수원을 보호하기라도 하듯 해먹은 초승달 모양으로 우리를 감싼다. 해먹에 들어가는 건 야생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장화와 두꺼운 바지도 필수다. 잎이 뾰족한 톱야자 덤불을 통과해야 하고, 오솔길에는 가끔 뱀도 나오기 때문이다. 톰 모리슨의 말로는 늪살무사와 방울뱀이 해마다 두 번씩 같은 경로를 따라 이동하며, 동쪽 과수원과 서쪽 과수원의 사잇길이 그들의 주된 이동 경로라고 한다. 내가 뱀을 제일 많이 목격한 곳도 바로 그 길이었으니 그의 말이 틀리진 않은 것 같다.
촘촘한 톱야자 덤불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해먹이 펼쳐진다. 로리 부인의 담장이 이어지는 곳은 널찍한 공원 같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야자나무와 상록참나무들 사이로 키 큰 대왕소나무가 자라며, 부드러운 참나무잎과 솔잎으로 땅이 뒤덮여 있어 걸을 때 발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이 고요한 곳에 파랑어치가 둥지를 튼다. 숲의 적막을 깨는 건 나무 위로 부드럽게 흐르는 바람 소리와 그 너머로 들려오는 녀석의 까랑까랑한 울음소리뿐이다.
서쪽 과수원, 그러니까 우리 집 옆 과수원을 지나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오렌지 호수와 맞닿은 또 다른 해먹이 나온다. 이곳은 처음부터 나의 진정한 도피처였고 마음이 힘들 때마다 무척 자주 갔다. 하지만 삶이 내게 더 많은 것을 내어주게 된 이후로는 거의 가지 않게 됐다. 싫증이 나서도 마음이 떠나서도 아니었다. 그저 인간과 자연의 관계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이란 오직 필요할 때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에 기대게 마련이고, 호숫가의 해먹은 내가 그곳에 가든 가지 않든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껏 내게 자양분이 되어주는 길을 그저 따라온 것처럼, 내가 필요로 할 때만 그곳을 찾아갈 뿐이다.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작고 황홀한 공간 하나 없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나의 호숫가 해먹에서는 나뭇가지 끝이 항상 미세하게 떨려서 가장 고요한 날에도 마치 지구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그곳에서는 스페인 이끼가 언제나 조금씩 흔들리고, 빽빽한 수풀을 지나면 상록참나무, 야자나무, 소나무처럼 큰 나무가 다문다문 솟은 땅이 이어진다. 봄에는 캐롤리나 재스민의 달큰한 향이 공기를 가득 채우고, 여름이면 잿빛 나무줄기를 감싸며 피어난 능소화 덩굴에서 붉은 꽃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가을과 겨울에는 호랑가시나무 열매가 작고 환한 등불처럼 어슴푸레한 빛 속을 밝힌다.
이곳 다람쥐들은 겁이 없다. 윤기 흐르는 검은 벨벳으로 만든 것 같은 거대한 여우다람쥐를 처음 만난 것도 바로 이곳에서였다. 스컹크는 애벌레를 찾느라 부지런히 땅에 구멍을 파면서 내 주변을 거리낌 없이 돌아다닌다. 녀석은 나무 둥치에 가만히 앉아 있는 나를 잠시 바라보는 듯하다가도 다시 침착한 신사처럼 제 할 일을 했고, 얼마 후 우아하게 몸을 흔들며 숲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메추라기들이 자주 나를 스쳐 지나다녔으므로 블랙베리 덤불 속 그들의 안식처도 알게 됐다. 거기서 메추라기들은 둥그렇게 모여 작고 부드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밤을 보냈다. 이렇게 숲속 동물들과 함께 그들의 땅에 머물 때면 나는 마치 외국에 나갔을 때처럼 나 자신의 세계가 확장되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가끔 해먹의 부엽토를 퍼다가 우리 집 장미와 동백과 치자나무에 뿌린다. 어느 날 아침 여느 때처럼 양동이를 들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 야생 포도 넝쿨 아래쪽으로 낯선 패턴의 색깔들과 숨결처럼 가벼운 움직임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목련나무 아래 야생 암퇘지 한 마리가 누워 쉬고 있었다. 그리고 약간 떨어진 곳에는 햇살처럼 신선한 새끼 돼지들이 아직 털도 마르지 않은 채 서로의 몸에 뒤엉켜 있었다. 출산 과정이 고되었는지 어미도 새끼도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어미는 온몸을 축 늘어뜨린 채 숨을 헐떡거렸고 새끼들은 강아지들처럼 옹기종기 모여서 꼬물거렸다. 맨 밑에 깔린 녀석은 그 말랑한 배에 바닥의 한기가 닿는 게 싫었는지 위로 올라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어느 순간 새끼 돼지들의 덩어리가 한꺼번에 꿈틀거리더니 가장 용감한 새끼 돼지 한 마리가 어미의 옆구리를 향해 꾸물꾸물 기어가기 시작했다. 몸 한가운데 허리띠라도 두른 것처럼 흰 줄무늬가 있는 자그마한 얼룩 돼지였다. 녀석은 털이 부숭부숭한 어미의 품에서 기적을 발견하고는 기쁨에 차서 낑낑거렸고, 곧 다른 새끼 돼지들도 모두 그쪽을 향해 기어갔다.
이렇듯 해먹의 숲은 숨을 쉰다. 생명은 이끼가 늘어진 숲과 습지, 사이프러스나무 사이를 관통하고, 야생 암퇘지와 새끼들을 관통하고, 나를 관통하며 끝없이 순환한다. 생명의 고요한 박동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존재가 된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 삶의 순환이고, 그 안에서 삶과 죽음은 희미한 황혼과 형체 없는 새벽처럼 서로 녹아든다.
우주가 숨을 쉬고 그 안의 세상도 같은 숨을 쉰다. 이것이 바로 무수한 태양과 달들로 인해 아름다워지는 우주적 생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박동과 충분히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면서 생명의 리듬을 느끼고 그 꾸준함에 위로받을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의 짧은 삶이란 아주 거대한 천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조각에 불과하며 생명은 그 자체로 존귀하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들꽃 한 다발
오늘 아침, 우리 집 양반이 들꽃 한 다발을 건넸다. 그이는 예전부터 늘 그랬다. 정원에서 기른 꽃이 아니라 숲과 들에서 피어난 들꽃을 꺾어다 준다. 내 눈에도 그런 들꽃이 훨씬 예쁘다.
오늘 받은 꽃다발에는 자주색 붓꽃 한 송이가 들어 있었다. 맨발로 뛰놀던 어린 시절, 너른 들판과 개울가에 핀 붓꽃을 꺾어 모으던 기억이 떠올랐다. 개울가 한쪽 축축한 둔덕에는 새파란 풀이 무성하게 자랐는데, 소들이 그쪽 풀을 유난히 좋아하여 해 질 녘 소를 찾으러 나가면 언제나 그 자리에 모여 있었다. 껑충한 수풀 사이로는 자주색과 흰색 붓꽃이 드문드문 피어 있었고, 나는 그 고요한 들판 귀퉁이에 서서 황소와 점박이 소, 얼룩소가 하루를 마무리하며 싱그러운 풀을 마저 뜯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나는 언덕 너머로 내려앉는 석양을 바라보았고, 물이 졸졸 흐르는 개울과 자주색 붓꽃을 사랑했고, 맨발에 전해지는 부드러운 풀의 감촉을 느끼며 세상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겼다.
꽃다발 속 잔잔한 패랭이꽃은 전혀 다른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시골 학교에 다니던 시절, 창문 하나가 깨져 그 아래로 유리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학교에 갓 입학한 여자아이 몇 명이 패랭이꽃을 한 줌씩 꺾어 들고 창 아래 올망졸망 모였다. 누군가가 꽃송이를 떼어 꽃잎에 물을 바르면 유리 조각 위에 붙일 수 있다는 걸 알아냈다. 우리는 함께 어울려 꽃을 붙였다. 유리에 붙여 말린 꽃은 한참 동안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반짝이는 유리 너머로 보는 꽃은 무척이나 예뻤다.
그해 여름 학교에서 배운 건 다 잊어버렸지만, 유리에 패랭이꽃을 붙여 만들었던 아름다운 화환과 별, 온갖 모양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오늘 아침 패랭이꽃의 은은한 향을 맡는 순간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하얀 꽃잎에 금빛 꽃술이 박힌 작은 데이지꽃은 주일학교로 가는 길가를 따라 빼곡히 피어 있었던 꽃이다. 아버지와 언니와 나는 일요일 아침마다 2마일 반을 걸어 교회에 갔다. 말들은 일주일 내내 열심히 일했으니 이날만큼은 쉬어야 했고, 어머니는 아직 어린 남동생과 함께 집에 남아 있곤 했다. 그래서 아버지, 메리 언니, 나 이렇게 세 사람만 따스한 봄 햇살을 받으며 교회까지 걸었다.
이제는 그 시절 주일학교에서 뭘 배웠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는 어렸으니까. 하지만 지금도 선명히 떠오르는, 굽이굽이 이어지던 푸르른 초목, 어룽어룽 어우러진 햇살과 그늘, 오솔길을 따라 흩뿌려져 있던 아름다운 금빛 꽃술의 데이지 꽃.
아! 벌써 오래전 일이다. 그 사이 세상이 많이 달라졌으니 사소한 기억은 전부 잊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그렇게 잔잔하고 소소한 순간들이 인생에서 진정 소중한 추억이 아닐까.
까마귀가 반짝이는 조약돌을 모으듯, 우리는 필요하지도 않은 것들을 잔뜩 쌓아놓고 산다. 앵무새처럼 내내 지껄이다가 그 말의 의미조차 잃곤 한다. 그럴듯한 말을 이리저리 쫓아다니고, 오래된 생각을 번지르르한 말로 잔뜩 꾸며 정작 그 생각 자체는 포장에 가려져버린다. 깡마른 사람이 풍성한 배럴스커트를 입으면 영락없이 묻혀버리는 것과 같다. 그런데도 다들 으스대며 외친다. “봐, 내가 얼마나 놀라운 생각을 해냈는지!”
성경에 ‘해 아래 새것은 없다’는 구절이 있다. 내 생각에 이 말은, 인생의 진리와 법칙에는 한계가 있어서 우리가 아무리 멀리 나아갔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범위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삶을 아무리 복잡하게 쌓아 올려도 우리는 언젠가 다시 그 진리를 마주하게 되고, 결국 먼 길을 둘러 같은 자리로 돌아왔음을 깨닫게 된다.
러시아 혁명도 마찬가지다. 혁명 후 러시아 국민은 오히려 중세 초기에 존재했던 자치적인 통치 형태로 되돌아간 것에 불과하니, 공화국이라는 체제 또한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나는 차라리 우리 각자의 삶에 개인적인 혁명이 일어나 더 단순하게, 살고 더 명료하게 생각하는 삶으로 돌아간다면 훨씬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삶을 진정 살 만하게 만드는 건 언제나 단순한 것들이다. 사랑과 의무, 일과 휴식, 자연을 가까이 두고 살아가는 소소한 기쁨 같은 것 말이다. 온실에서 자란 그 어떤 꽃도 내가 받은 들꽃 한 다발의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에 견줄 수 없다.
숲속에서의 오후
숲은 인간에게 얼마나 고귀한 선물인지!
그 유용함과 아름다움에 우리는 얼마나 깊이 감사하고 감탄해야 하는지!
화려하고 소란스러운 속세를 벗어나 숲에 들어서면, 머리 위로 내려앉는 나무 그늘이 얼마나 기분 좋은지! 천국에서 불어온 바람이 아늑한 가지들 사이에 머물고, 햇살이 푸르른 잎 위로 축복처럼 내려앉는다. 나무껍질과 열매의 향을 머금은 숲의 숨결이 이마를 상쾌하게 어루만지고, 현란하지도 음울하지도 않으며 고요하고 평화로운 기운을 띤 아름다운 숲의 빛이 마음에 잔잔한 평온을 드리운다.
숲에서는 먼 곳을 내다볼 수 없고 사방이 비슷한 풍경으로 가득하지만, 그 품속에서 마음은 일상의 사소한 생각을 내려놓고 더 깊이 사유하게 되며 오직 신의 창조물과 함께 있음을 고요히 자각하게 된다. 발 아래 소박하게 자라난 이끼, 향기로운 꽃들, 온갖 종류의 덤불, 키 큰 나무들, 신성한 푸른빛 하늘... 이 모든 것이 신의 작품이다.
이들은 신의 뜻에 따라, 지금 우리가 보는 것처럼 지혜와 선의가 깃든 모습으로 창조되었다. 이곳의 모든 존재는 우리가 미처 헤아릴 수 없는 귀한 가치가 있으며, 우리가 다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깊은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뿌리 주변을 기어다니는 굼뜬 벌레조차 전능한 신의 힘으로 살아가고, 색 바랜 낙엽 부스러기조차 하찮은 잡초 아래 썩으며 땅에 풍요의 축복을 남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수천 가지 형태로 우아함과 강인함을 높이 뻗어 올린 나무들, 그 거대한 나무들이야말로 우리 마음을 경이와 찬탄으로 가득 채운다.
대지의 품에서 태어나는 무한히 다양한 결실 가운데 가장 존엄한 존재는 숲의 나무들이다. 탄생과 죽음의 변화를 겪는 모든 피조물 중 숲의 나무들이 가장 긴 생을 누린다. 빛바랜 대지를 덮은 모든 존재 중에서도 숲은 변치 않고 기나긴 세월 동안 본연의 특성을 간직한다. 인간이 만든 것들은 끊임 없이 모습을 바꾼다. 마을이나 논밭은 시대마다 변하는 인간의 불안정한 생각과 변덕스러운 의지를 고스란히 반영하지만, 그 경계 너머의 숲은 오늘날에도 수천 년 전과 다름없이 존재한다. 영원한 산맥만큼이나 오래된 이 숲은 수천 번의 계절을 지나는 동안 잎을 틔우고 떨어뜨리기를 반복하면서, 대 홍수가 만든 폐허를 뒤덮으라 했던 신의 음성을 얌전히 따르고 있다.
그러나 숲이 아무리 크고 오래되었다 한들, 숲을 이루는 고목들은 결국 모든 존재가 겪어야만 하는 지상의 운명 앞에 고개 숙인다. 나무들의 시간도 정해져 있어 언젠가는 가지가 시간의 이끼로 뒤덮이고, 쇠락의 손길이 닿으면 부스러지고 쓰러져 먼지로 돌아간다. 이들도 우리처럼 생명의 아름다움으로 치장한 존재이며 그렇기에 우리처럼 죽음의 먹잇감이 된다. 인간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나무에 경탄하면서, 우리는 생의 아름다움과 죽음의 쓸쓸함이 함께 자아내는 신비로운 매력을 받아들이게 된다.
숲의 독특한 본성은, 그 속에 생명과 죽음이 늘 서로 가까이 존재하고, 어느 쪽이나 소리 없는 전진을 거듭하며 서로 우위를 겨룬다는 점이다. 숲에는 생명의 기운이 널리 퍼져 있지만, 죽음은 훨씬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봄이 온갖 생명의 풍요로움과 기쁨을 품고 찾아올 때도, 숲속에는 봄의 도래를 알아채지 못하는 나무가 많다. 쓰러진 나무줄기와 거칠게 드러난 뿌리 근처에는 수천의 새싹들이 돋아나, 나무가 생전에 지녔던 청청함을 흉내 내며 그 음울한 잔해를 부드럽게 감싸보려 한다. 그러나 썩어가는 고사목이 우아하게 새 나뭇잎 화관을 써보기도 전에, 새싹 절반은 한해를 넘기지 못하고 시들어 죽는다.
이처럼 숲에 언제나 존재하는 죽음은 차분하고 엄숙하며 어딘가 성스럽다는 인상까지 주는데, 이토록 깊이 절제된 감정은 너른 들판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힘은 결코 지나치게 우울하지도, 우리를 짓누르지도 않는다. 생의 아름다움이 지닌 활기가 반드시 그 무게를 덜어내기 때문이다.
쓰러진 나무 옆에도, 부서진 가지 사이에도 봄 내내 향기로운 꽃들이 피어난다. 숲의 자유로움과 거침없는 성장 속에서 제각각 자리 잡은 나무들은 야생의 다채로운 아름다움과 기묘한 형태들이 싹트기에 알맞다. 그 다양한 모습은 우리가 마음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해주며, 그늘진 숲속에 반짝이며 쏟아지는 황금빛 햇살처럼 우리에게 기쁨과 활기를 선사한다. 신의 모든 피조물에 각인된 그 풍부한 다양성은, 숲에서 특히 뚜렷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발현된다.
들에서는 서로 꼭 닮은 풀잎을 찾을 수 없고 정원에도 완전히 똑같은 꽃은 피지 않지만, 그 차이는 너무 미미해서 쉽게 알아차릴 수 없다. 그러나 숲에서는 그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나, 나무의 다양한 모습을 누구라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나무줄기, 가지, 잎사귀, 울퉁불퉁한 옹이, 구불구불 뒤틀린 뿌리, 나무껍질 위로 자라는 이끼... 이들의 형태, 색, 그림자 그 모든 부분에 제각각 개성이 또렷이 담겨 있다. 이 다채롭고 아름다운 풍요 속에는 달콤한 평화, 고귀한 조화, 잔잔한 평온이 깃들어 있으며, 이처럼 충만한 정취는 다른 어디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이곳의 언덕과 그 아래 펼쳐진 분지는 기나긴 세월 동안 하나의 큰 숲으로 존재해 왔다. 수많은 계절이 지나고 기록되지 않은 시대가 흘러가는 동안 이 숲은 끝없이 이어지는 원시림의 일부였다. 나무들은 계곡 위로 물결치고, 봉긋봉긋한 언덕 위로 자라났으며, 골짜기를 채우고, 깊은 협곡을 메우고, 시냇물과 샘물 위로 그늘을 드리우고, 호수와 강 옆에서 뿌리를 적셨고, 섬 위로도 옮겨갔고, 너른 언덕을 뒤덮었고, 모든 산봉우리를 왕관처럼 감쌌다. 온 땅이 숲의 어스름 속에서 고요한 잠에 들었고, 거칠고 야성적인 꿈이 아득하게 뒤섞였다. 포식자의 굶주린 울음소리, 야만인들의 사나움, 함성과 춤, 승리와 고통이 간헐적으로 깊은 침묵을 깨고 터져 나왔다가 이내 사그라들면, 생명의 숨결만이 바람결을 따라 고요히 오르내렸다.
비탈의 바위 절벽, 저지대의 습지 하나하나에도 살아 숨 쉬는 녹음의 장막이 겹겹이 드리웠다. 이편에서는 소나무, 솔송나무, 전나무로 이루어진 짙은 물결이 협곡을 가로질러 흘렀고, 저편 언덕 위로는 참나무, 단풍나무, 밤나무가 윤기 나는 짙푸른 잎사귀를 뽐냈다. 산허리에는 자작나무, 느릅나무, 사시나무가 산뜻한 바람결 같은 숲을 만들어냈다. 여름 햇살 아래 온갖 초록빛 잎들이 춤을 추었고, 달빛 아래 살랑살랑 흔들렸으며,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푸른 잎사귀 위로 고루 내려앉았다.
그러나 60년이라는 세월 동안 자연은 놀랄 만큼 달라졌다. 저지대의 숲은 사라졌고, 주변을 둘러봐도 개간되지 않은 땅은 하나도 없다. 앞으로 반세기만 더 흐르면 이 땅은 황량하고 헐벗은 곳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모든 숲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둘러보면 완전히 벌거벗은 산은 하나도 없고, 듬성듬성 헐벗은 모습을 내보이는 봉우리도 없다. 호숫가 언저리에는 여전히 기슭부터 꼭대기까지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언덕이 몇몇 남아 있다. 숲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조심스레 길을 찾아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가며 원주민들이 사랑했던 나무 그늘 오솔길을 오래도록 걷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