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 열두 살 소녀 강인숙은 밤중에 38선 한탄강 철교를 기어서 건넌다. 침목 사이가 너무 넓어 뱀처럼 납작 엎드려 건너야 했던 그 철교를. 이 장면에서 시작되는 『서울과의 만남』은 피란민 가족이 서울에 뿌리내리기까지의 혹독하고도 생생한 기록이다.
책은 과거와 현재가 교차한다. 글을 쓰다가 문득 경원선을 타야겠다고 생각한 83세의 저자가 한탄강역에 내려 철교 앞에 서는 장면, 70년 전 기어서 건넌 다리를 바라보며 그 시절 가족들을 불러 세우는 장면은 회고록이 아니라 한 편의 시처럼 읽힌다. 저자 스스로 밝히듯 "상상력이 부족하고 고지식해서 직접 겪은 것밖에 쓸 수 없는" 사람이 쓴 책이기에, 이 책에 담긴 모든 장면은 더욱 묵직하다.
■ 저자 강인숙
건국대학교 명예교수이자 현재 영인문학관 관장이다. 1933년 함경남도 갑산에서 출생, 경기여자 중ㆍ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숙명여자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평론가로 등단, 건국대학교 교수와 문학평론가로 활동했다.
저서로 논문집 『자연주의 문학론 Ⅰ, Ⅱ』 『일본 모더니즘 소설 연구』 『박완서 소설에 나타난 도시와 모성』 등이 있으며, 문화기행집 『함께 웃고, 배우고, 사랑하고-네 자매의 스페인 여행』 『이집트 문화기행』 『시칠리아에서 본 그리스』, 자전적 에세이 『글로 지은 집』 『만남』 『나는 글과 오래 논다』 『성안집 사람들』 등이 있다.
청엽정3가 48번지/무덤에 깔아 준 방석/강 내과와 가족 복지/부숙이네 가게와 천 서방네 가게/진이 엄마/헤픈 우정의 속내/재봉틀과 멸치/효창초등학교
Ⅲ. 멀고 먼 학교
정동 1번지/전차 problem/교훈과 교가의 수사학/교과서에서 배운 우리 문학/서점 없는 시대의 책 읽기/뿌리 다시 내리기
Ⅳ. 먼저 떠난 친구들
강형순/이범준/양찬집/김주상/박경희
Ⅴ. 선생님, 우리 선생님
우리 역사 선생님은 곰돌이/조흔파 선생과 「사미인곡」/‘유랑의 무리’ 합창과 김순애 선생/‘6시 5분 전’ 채인기 선생/새내기 물리 선생 유한흥
Ⅵ. 내가 만난 서울
내 짝꿍의 신부 놀이/서울스럽게 늙는다
‘보편적 삶의 질서가 깨진 시대’, 즉 ‘비상시(非常時)’의 연속이었던 소녀 시절의 고백. 1933년생인 저자는 초등학생 시절 2차 대전을 겪으며 솔뿌리를 캐는 근로 동원에 시달렸고, 해방 후 공산 정권이 들어서려 하자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남하했다. 열두 살 소녀가 밤중에 38선인 한탄강 철교 침목 사이를 뱀처럼 기어서 건너며 시작된 남하 여정은, 검은 매연을 뒤집어쓴 채 미군의 DDT 소독약 세례를 받으며 서울에 입성하는 혹독한 ‘서울과의 첫 만남’으로 이어진다.
서울과의 만남
기차 지붕에 타다
포도 무늬 누비이불
해방이 되고 우리는 석 달 만에 38선을 넘어 서울로 왔다. 11월이었으니까 밤에는 추운데,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 깜깜한 밤에 기차를 탔다. 기차를 탄 것이 아니다. 기차 꼭대기에 기어오른 것이다. 그 무렵에 북에서는 화물차밖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기차 지붕에 올라가야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이북 피란민들은 모두 기차 꼭대기에 앉아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이다. 약간 둥그스름하게 부푼 기차 지붕에는 폭이 30센티 정도 되는 평평한 판자가 두 줄로 붙여져 있어 앉을 자리가 있다. 피란민들은 거기에 등을 맞대고 두 줄로 앉는다. 자리가 모자라니까 바짝바짝 붙어 앉아야 한다. 인도의 기차처럼 지붕에 다닥다닥 사람이 달려 있으니까 멀리에서 보면 기차 지붕에 거대한 포도송이들이 잔뜩 열린 것 같다.
집이 정거장 앞에 있어서 우리는 석 달 동안 만주에서 오는 피란민들이 지붕에 다닥다닥 열려 있는 기차를 날마다 보면서 살았다. 피란민들은 매연에 그을린 데다가 세수를 못 해 눈썹도 콧구멍도 새까매서 검은 원숭이와 비슷했다. 그런데 우리도 드디어 그 무리에 끼게 된 것이다. 달리는 기차 지붕 위는 밤에는 추웠지만, 낮에는 전망이 좋아서 견딜 만했다.
처음 하루는 그 높은 곳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오픈카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높아서 먼 곳까지 잘 보였다. 산악지대라 경치가 아주 좋았다. 그것 내가 본 일이 없는, 넓고 새로운 세계였다. 왼쪽으로는 동해가 이어지고 오른쪽은 저만치에 하늘에 닿을 듯이 높은 산맥이 있는데, 들판에서는 콩서리를 하는 가느다란 연기가 여기저기에서 하얗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옆에 바짝 붙어 있는 것이 언니나 동생의 몸이니까, 자리가 좁은 것도 별로 문제되지 않았다. 역마살이 있는 나는 한없이 시계(視界)가 넓은 높은 발판에 앉아 빨리 달리고 있는 것을, 마치 특혜라도 받은 것처럼 송구스러워하며 즐겼다. 더구나 이 풍경들은 내가 처음으로 보는 것이다.
첫날은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밤에 기차를 탔지만, 두 정거장만 가서 오빠 집에서 잤기 때문에, 마치 오빠네 집으로 놀러 간 것 같아 즐거웠다. 오빠네 집에는 내가 세상에서 만난 제일 예쁜 아기였던 첫 조카가 있다. 다음 날도 견딜 만했다. 신선들이 떼 지어 하강할 것 같은, 아름다운 동해안의 바다와 드높은 산들을, 전망대 같은 높은 곳에서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이상 노래가 나올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연기 때문이다. 석탄 차의 풍성한 검은 연기가 바람을 따라 뒤쪽으로 길게 길게 나부끼면서 기차 위의 사람들에게 매연을 뿌려 댔다. 터널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도 만만치 않았다. 터널이 다가오면 매번 키 큰 아버지의 몸이 터널의 아치에 걸릴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멀리에서 보면 터널 입구가 아주 작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는 좁은 공간에서 매연을 몽땅 뒤집어써야 하니 그것도 힘들었다. 우리는 모두 숨이 차고 기침이 났다. 그런데 산악지대라서 터널이 너무 많았다.
오후가 되니 동생의 속눈썹과 코끝이 검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모두 옷과 얼굴에 그을음이 앉아 피란민다워졌다. 매연에 배어 있는 석탄 냄새도 역겨웠다. 기차 꼭대기는 돈을 안 내고 타는 무료 구역이어서 지정 좌석이 없다. 그 자유는 비싼 대가를 요구했다. 그 망망한 자유의 폭만큼 많은 불편이 따랐다. 거기에는 난간도 손잡이도 없어서 잘못하면 굴러떨어지기 쉽다. 먹을거리도 물도 없고, 화장실도 없다. 마실 물이 없는데 세수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사치다. 그런데다가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하다. 밤에 졸기라도 하면 곧장 아래로 곤두박질치게 된다. 한 치 앞이 저승이다. 어머니는 짐 속에서 무명 치마를 꺼내 찢어서 길고 긴 끈을 만들었다. 죽어도 같이 죽으려고 식구들을 둘러 가며 묶기 위해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끈으로는 우리 집단과 바닥의 나무를 묶었다. 졸아도 굴러떨어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잘못하면 몽땅 한 덩어리로 굴러떨어질 수도 있다. 여섯 사람이 붙어 버려서 몸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게 된 우리는 숨이 막힐 것 같아 칭얼대기 시작했다. 떨어지면 죽으니까 어른들은 밤새 교대로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 배설도 영양 공급도 불가능한 그 극한의 지대에서, 피란민들은 매연에 뒤덮여 숨이 막히고, 추락의 두려움에 몸이 굳어 갔다. 허기져 비틀대는 피란민들을 밤이면 추위까지 괴롭힌다.
북쪽의 11월은 이미 겨울이다. 어린애들은 기온이 떨어지는 밤에 감기에 걸릴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어머니는 피란을 떠나기 위해 몇 달 동안 필사적으로 뜨개질을 하셨다. 집에 있는 제일 굵은 털실로 아이들의 옷을 짜고, 자투리 식을 모아 알록달록한 속옷도 짰다. 떠날 때 어머니는 우리에게 그 털옷들을 겹겹이 껴입혔다.
그 한 무더기의 가족들 전부를 덮기 위해, 그때 어머니가 가지고 온 유일한 덮개가, 애지중지하던 포도 무늬 이불이었다. 이불 속에 몸을 감추고, 우리 식구는 거대한 만두처럼 하나가 되어, 서로의 체온과 여름 이불의 빈약한 온기로 가까스로 초겨울 밤의 추위를 견뎠다. 부모님이 밤을 새우며 아이들을 지키지만, 혹시 잠깐이라도 졸면 온 식구가 떨어져 죽을 판이다. 그래서 사흘째부터는 밤에는 기차에서 내렸다. 아무 집에서나 얻어 자고 낮에만 기차를 탄 것이다.
서울이 가까워져 올수록 피란민 수가 늘어나서 한번 내리면 여섯 식구가 다시 기차 꼭대기에 비집고 들어가는 일이 어려워졌다. 땅 위에서 누워 잔 값을 톡톡히 치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까지 오는 데 열흘쯤 걸렸던 것 같다. 그동안 여러 번 기차를 타고 내리고 했지만, 객차에 타 본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기차 꼭대기에만 앉아서 오니 며칠이 지나자 얼굴이 매연에 그을려서 누군지 알아보기도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아이들의 뺨이 추위 때문에 터지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예쁜 이불도 아이들과 비슷해졌다. 사람과 이불이 모두 매연에 절었다.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오빠네가 있던 군선(群仙)역에서 아버지가 트렁크를 날치기당했다. 우리 식구는 삽시간에 귀중품을 다 날렸다. 부모님의 전대에 넣고 남은 돈과 금붙이와 보험증서 같은 것들이 거기 들어 있었다. 성적표와 상장, 사진 같은 것들도 모두 거기 있었다. 식구들의 나들이옷도 마찬가지다.
어른들이 사십 평생을 근검저축해서 모은 재산을 모두 버리고, 들고 갈 수 있는 것만 가지고 떠난 피란민 가족은, 뿌리를 몽땅 뽑힌 나무와 같은데, 설상가상으로 들고 온 짐마저 도적맞으니 문자 그대로 빈손이 되었다. 우리는 낯선 고장에서 다시 새출발하려던 가냘픈 희망마저 상실해서, 아이 어른이 모두 풀이 죽었다. 졸지에 거지처럼 되어 버려서, 서울에 왔을 때는 학교에 입고 갈 옷조차 없었다.
서울에 오니 일본 사람들이 두고 간 이불이 많았다. 그들도 가벼운 것은 들고 가서 두꺼운 이불만 있었다. 그래서 포도 무늬 이불은 서울에서도 여름이면 유용한 덮개가 되었다. 5년 후에 또 전쟁이 터져 다시 기차 꼭대기에 올라가야 할 형편이 되었을 때도, 들고 갈 수 있는 이불은 그 이불밖에 없었다. 남동생을 잃었고, 피란처를 마련하려고 선발대로 가신 아버지는 제2 방위선에 갇혀서 죽산에서 나오지 못하셨다. 남은 것은 딸 셋과 어머니뿐이어서 전보다 이불이 좀 여유가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이번에도 그 이불을 북에서 피란 올 때처럼 기차 꼭대기에서도 남의 집 헛간에서도 잠을 잘 때마다 애용했다.
오빠가 있는 군산까지 십여 일이 걸려서 내려간 1·4 후퇴 때는 소한과 대한 사이여서 추위가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해에는 고맙게도 12월에 한강이 얼어서, 많은 피란민이 짐을 실은 달구지를 밀며 걸어서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 추위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던 누비이불에는 이미 왕년의 품격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피란살이 5년 동안에 이불은 낡고 삭아서 누빈 실이 거의 뜯어져 나가고 솜도 더러 뭉쳐있었다. 문양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데는 닳아서 희끗희끗해지고 어떤 데는 뜯어지니 이불은 실성한 여자 같은 몰골이 되었다.
그런 이불의 모양새는 그대로 우리 가족의 모습이었다. 뿌리가 뽑혀서 겨우 새 땅에 착근하려 버둥대는데 다시 새 전쟁이 터져서, 5년 만에 또 기차 꼭대기 신세가 된 난민 가족. 목숨이 붙어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우리는 전쟁을 겪고 또 겪으면서, 실밥이 뜯어지고 무늬도 빛이 바랜 포도 무늬 이불을 닮아 갔다. 이건 우리 어머니의 꿈 잔해(殘骸)이기도 했다. 이불은 어머니의 유일한 사치였고 꿈이었기 때문이다.
검댕이로 매닥질을 한 따라지의 모습…… 그것 모든 나라 피란민의 모습이다. 신문에서 바다를 향해 모래에 코를 박고 죽어 있는 세 살짜리 아일란의 사진을 보았다. 빨간 티셔츠를 입은 꼬마의 시체를 보니, 죽은 남동생 생각이 났다. 시리아에서 튀르키예까지 그 먼 길을 피란 온 난민 아기 아일란 쿠르디. 보드룸 해변에 차가운 시체로 누워 있는 아일란의 모습은 다다미 위에 시체로 누워 있던 내 동생의 모습이었다. ""따라지""…… 그때 사람들은, 그렇게 힘들게 자유를 찾아 내려온 피란민을 ""38 따라지""라고 불렀다. 서울 아이들이 텃세하면서, 오자마자 우등을 한 영특한 남동생을 ""개뼈다귀""라고 부르며 놀려 댔다. 너무 말랐다는 뜻이다. 아이들이 ""개뼈다귀""처럼 말라가다가, 남의 나라 바닷가에 코를 박고 죽는 세월은 이제 오지 않으면 좋겠다. 전쟁은 어떤 명분으로도 합리화할 수 없는 가장 악독한 죄악이다.
다시 본 한탄강 철교
1945년 이 계절에 나는 북에서 경원선 열차를 타고 연천까지 왔다. 그때는 연천 동두천 사이가 북한과 남한의 경계선이었다. 기차가 못 다니는 구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탄강에 걸린 철교 위를 걸어서 38선을 넘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철로는 단선(單線) 궤도였던 것 같다. 그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두부모처럼 모서리까지 반듯하게 꽉 차서, 남으로, 남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철교에는 난간조차 없으니 한 치 밖이 저승이다. 소련군이 밤에만 몰래 보내주니까 피란민들은 누구나 허공에 걸린 것 같은 철도의 침목 위에서 밤에 남사당패처럼 목숨을 건 곡예를 해야 한다.
그때는 동두천이 남쪽의 터미널이었는데, 지금은 연천의 신탄리(新炭里)가 종점이다. 휴전선 덕에 경계선이 원래 것보다 다섯 정거장이나 북으로 올라간 것이다. 경원선 열차는 동두천?소요산?초성리?한탄강?전곡?연천?신망리?대광리?신탄리 구간을 한 시간 동안 북을 향해 달린다고 한다. 신탄리에 가면 백마고지가 보이고, ""철마는 달리고 싶다""고 쓰인 현판이 서 있으며 북한으로 보내는 편지를 넣는 커다란 우체통도 있다고 한다.
경원선은 오빠와 언니들이 방학마다 집으로 가던 귀향 철도였다. 나도 그들처럼 귀향하고 싶다. 16킬로의 철도 차단 구간을, 차바퀴로 맨땅을 긁으면서라도 내쳐 달려만 가면, 거기 저승에 간 가족들이 모여서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지금 저승으로 여행을 떠나는 에네이드처럼 마음이 착잡하다.
하도 오래돼서 언제 서울에 도착했는지 정확한 날짜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해에 서울에 온 우리가 철이 지나서 김장을 하지 못했던 것만은 생생하게 기억된다. 언니와 둘이 익선동 건하 아저씨 댁에 가서 두 차례나 양은 양동이에 김치를 잔뜩 얻어다 먹었다. 오래간만에 김치를 본 남동생이 환장하고 덤벼들었다. 손으로 김치를 찢어 먹는 아이에게 누나들이 잔소리한다. 어머니는 꾸지람에도 남녀 차별을 두었으니까, 누나들은 남동생의 잘못을 봐주고 싶지 않아서, 필요 이상으로 날을 세운다. 그게 그 애의 마지막 겨울인 것을 몰랐던 것이다.
70년 전에 나는 이 코스를 거꾸로 걸어 내려오는 여행을 했다. 연천에서 시작해서 동두천까지 일곱 정거장을 걸어서 내려왔다. 그건 여행이 아니라 목숨을 건 피란행이었다. 피란민답게 우리는 연천까지 기차 꼭대기에 앉아서 왔다. 피란민답게 우리는 누구나 한결같이 구지레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피란민답게 우리는 모두 지쳐 있었다. 피란민답게 우리는 모두 배가 고팠다. 해방되던 해 입동 무렵의 일이다.
그때 열두 살이었던 나는 초등학교 6학년생. 키 1미터 20센티, 파리한 약골의 꼬마 아가씨였다. 제일 먼저 연천에서 전곡까지 걸었다. 캄캄한 밤이었다. 거기서 소련군 초소를 지나갔다. 그리고 또 아주 많이 걸어서 경계선인 한탄강 철교 앞에 섰다. 철교는 먼 하늘에 걸린 은하수처럼 높게 느껴졌다. 한탄강 건너기는 영원한 악몽이다. 다리를 건너도 희망은 없다. 사지에는 이미 감각이 없어졌는데, 동두천까지 또 세 정거장을 더 걸어야 한다. 모두 합해야 40리 아니면 50리쯤 되는 거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열두 살의 내게는 땅끝처럼 멀게 느껴졌다. 어둠 속을 밤새도록 걸었던 것 같은 기억이 머리에서 굳어 버린 것이다.
그때 이야기를 글로 쓰다가, 문득 경원선을 탈 수 있겠다는 생각이 영감처럼 떠올랐다. 동쪽은 휴전선이 38선보다 북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철원까지 남한 땅이 된 것이다. 그 부분을 경원선이 북을 향해 달린다. 70년의 세월이 기억의 테두리를 부수어서, 나는 그 무렵의 일들을 기억하는 것이 너무 적다. 그때 나는 어떤 색 옷을 입고 있었을까? 무엇을 먹었을까? 며칠 걸려 서울에 왔을까? 한탄강은 정말 나락처럼 깊었을까? 철교의 침목 사이는 정말 그렇게 벌어져 있었을까?
여울이 커서 한탄강이라 했다는데, 큰 여울이 정말 여기 있기나 했는지 자신이 없어진다. 터널이 없는 들판을 기차가 달리고 있다. 온몸이 감관(感官)이 된 것처럼 전신으로 단풍도 느끼고, 물소리도 느끼고, 혼자 경원선을 타고 있는 나의 고독도 느낀다. 퇴근하는 사람들처럼 총총히 내게서 떠나가 버린 그리운 가족들 그리고 미국에 살고 있는 형제를 생각을 한다. 미국은 또 다른 의미에서 내게는 저승이다. 모두 늙어서 몇 해가 지나도 서로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주 먼 곳, 아주 아득한 곳……. 대체 거기에 그들은 살아 있기나 한 것일까?
피란 와서 종이호랑이가 되어 버렸던 어머니, 하는 일마다 실패하던 아버지, 울며 넘던 다리 너머에서 숨을 거두어 아직도 여덟 살인 남동생, 녹내장으로 이제는 앞 못 보는 노인이 된 여동생……. 그들을 다 불러 모아 한탄강 철교 위에 다시 서본다. 시들어 가는 나무들에서 숨진 냄새가 풍겨 온다. 고향의 냄새다. 철로가 잘린 경원선 밑에 아직도 한탄강이 있기는 하다. 물소리가 잦아든 잠잠한 강이다.
서울과의 만남
청엽정3가 48번지
다음 날 동두천에서 기차를 타고 용산역에 내렸다. 역 건물이 생각보다 허술하고 작아서 실망했다. 창고같이 장식이 없고, 몰취미하다는 점에서 그것은 우리 동네 정거장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다. 들끓는 피란민들, 지저분한 구멍가게, 허둥대는 지게 부대 그리고 거지들……, 주변도 정신없이 어수선했다. 전차를 타고 남영동까지 갔다. 지금 것과 거의 비슷한 남영동 굴다리를 지나 우회전해서 청엽정3가 48번지에 도착했다. 깔끔하고 교양 있어 보이는 50대 초의 일본인 부부가 우리를 맞이했다. 사메지마 씨라 했다.
사메지마네 집은 조선인 소유여서 값이 비쌌다. 청엽정1가에 있는 친지의 집은 2층인데, 일본인 소유여서 삼천 원밖에 하지 않는데, 우리 집은 단층이고 방이 세 개밖에 없는 데도 만 오천 원을 주었다고 하셨다. 다섯 배나 비싼 것이다. 적산가옥은 소유권이 앞으로 어떻게 처리될지 예측할 수 없으니까, 일본 사람들은 푼돈이라도 받고 팔려고 상성을 했고, 한국 사람들은 위험 폭이 크니까 선뜻 손을 내밀지 않아서, 아주 적은 액수로 거래가 되었다. 피란민들은 돈이 모자라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적산가옥을 샀다. 우리 동네 친지도 돈이 적어서 싼 집을 사 달라고 했기 때문에 적산가옥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적산가옥은 거의 다 피란민들 차지가 되어갔다.
정말로 다행스럽게도, 사메지마 부인은 인품이 좋았다. 그녀는 친절하고 너그러운 데다가 인자한 미인이어서 나의 낯가림을 많이 완화해 주었다. 그녀는 아이가 없었는데도 우리 형제 넷이 목욕탕에서 떠들면서 부산을 썰어도 짜증을 내지 않았다. 우리에게 비누와 수건을 주고, 단팥죽까지 만들어 주는 손이 따뜻했다.
그들은 출국 허가를 기다리는 중이어서 당분간 우리와 같이 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사메지마 씨는 처제 부부에게 서재를 주고, 자시키를 우리를 위해 비워 놓았다. 우리가 살던 집과는 구조나 인테리어가 다른, 너무나 낯선 공간이었지만, 오래 기차 꼭대기에서 지낸 후여서 우리는 바닥에 등을 대고 잘 수 있는 것 자체가 황감했다. 뒷마당에도 수도가 있어서 우리는 그 복도에서 일본인들이 빌려 준 풍로와 전기 곤로로 음식을 해 먹었다. 사메지마 부부는 아이를 못 낳아서 처제를 입양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열흘쯤 지나니 그들이 떠나는 날이 왔다. 그들도 우리처럼 대부분의 소유물을 그냥 두고 떠났다. 노숙용 투박한 솜옷으로 갈아입고, 많은 것을 두고 떠나는 그들을 보니 마음이 안 좋았다. 손때 묻은 친숙한 물건을 다 두고 떠날 때의 상실감이 어떤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돈이 많으니까 우리보다 좋은 옷을 입고 있었고, 고리짝들과 멋있는 트렁크를 손수레에 싣고 있었다. 그들 일행은 손수레를 구해다 고리짝을 잔뜩 싣고 떠났는데, 그들이 가는 길도 짐을 옮겨줄 일꾼이나 손수레 같은 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각박한 행로일 것이다. 남한에서는 기차가 운행되고 있었으니까 저들은 아마 우리처럼 기차 꼭대기에 타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머지않아 그중에서 남을 것은 얼마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들은 인천까지 가서 다시 바다를 건너야 한다. 일본에 가서도 시코쿠까지 가려면 기차를 여러 번 갈아타야 할 것이다. 우리보다 더 길고 힘든 여정(旅程)이다. 더구나 그들은 폐허가 된 고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애초부터 기차 꼭대기에 타야해서 아예 빈손으로 떠난 우리 쪽이 어쩌면 나았는지도 모른다. 한국에 와서 호의호식하는 동안에 그들의 시간도 어김없이 흘러갔을 것이다. 그 기간에 축적한 재물은 이제 버릴 수밖에 없는 짐이 되었는데,
고향과의 거리는 한국에서 보낸 시간의 길이만큼 멀어졌을 것이 않을까? 그렇다면 저들도 우리처럼 지금 서먹서먹한 낯선 세계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처럼 앞날이 불안할 것이다. 만주에서 오던 일본 여자가 머리에 짐을 이고 등에 아이를 업어서, 걸으면서 설사하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설사 똥을 줄줄이 길에 흘리면서 수치심 때문에 울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점잖으니까 돌팔매를 던지지는 않았지만, 저들의 앞날이 평탄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나는 사메지마 부인이 가여워졌다.
호전적인 지도자를 만난 일본 남자들은, 만주와 남양군도의 풀숲에서 구더기에게 뜯기는 신세가 되고, 여자들은 걸으면서 설사를 하는 참상이 벌어졌다. 전쟁은 합리화할 수 없는 악이다. 그런 전쟁을 그들이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까지 휘말려서 젊은이들은 학병과 정신대 등에 끌려갔고, 나라는 두 동강이 나 버린 것이다. 벌은 그들이 받아야하는데 우리까지 환난 속에 던져졌으니,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