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의 책
 
지은이 : 후안 비요로 (지은이), 보탬 (옮긴이)
출판사 : 열림원
출판일 : 2026년 06월



  • 책은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읽힐지 스스로 결정한다. 읽는 사람, 독자(讀者)는 반대로 책에게 선택받고 읽히는 존재가 된다. 《야생의 책》은 열세 살 소년 후안이 미스터리한 띠또 삼촌의 도서관에 머물게 되면서 시작된다. 



    야생의 책


    이별

    지금부터 내가 열세 살이던 해, 내게 일어났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내 목을 조르고 있는 듯 이제껏 한시도 잊을 수 없었던 이야기이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 이야기의 두 손이 나를 바싹 조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느낌이 얼마나 생생한지 손에 장갑을 낀 것까지 알 정도이다.

    이 얘기를 비밀로 간직하는 동안 나는 그 이야기의 포로였다. 하지만 이 글을 쓰기 시작하자 슬며시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그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 정도가 느슨해진 걸 보면, 이 글을 끝마치는 순간 자유로워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든다.

    모든 건 매시트포테이토 냄새와 함께 시작됐다. 엄마는 불만이 있거나 기분이 나쁠 때면 매시트포테이토를 만들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담아, 필요 이상으로 힘을 쓰며 감자를 박살냈다. 그래야 마음이 가라앉는 모양이었다. 매시트포테이토는 우리 집에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였지만, 나는 언제나 매시트포 테이토가 좋았다.

    그날 오후에도, 부엌에서 매시트포테이토 냄새가 살살 풍겨 오자 나는 득달같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러 갔다. 엄마는 내가 와 있는지도 까마득히 모른 채 숨죽여 울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내가 사랑하던 명랑한 엄마로 다시 되돌려 놓았겠지만, 어떻게 해야 엄마의 기분이 풀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때부터 계속해서 나는 밤마다 엄마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엉뚱한 시간에 깨기 시작했다. 아이였을 때는 통나무처럼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런데 열세 살이 되자 진홍빛 꿈을 꾸었다. 악몽은 매번 반복되었다. 축축하고 깜깜하고 기다란 통로에 내가 서 있는데, 그 통로 끝에는 시뻘건 한줄기 불빛이 깜빡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그쪽으로 다가가자 나는 내가 어느 성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둠 속에 울려 퍼지는 내 발소리를 들어 보니 나는 쇠로 된 장화를 신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복도 끝에서 울고 있는 누군가를 구하러 온 무장한 군인이었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불쾌하지는 않았지만 믿기 어려울 만큼 슬픈 목소리였다. 나는 이상할 정도로 오래 그 목소리를 향해 걸어갔다.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복도가 더 길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나는 사방이 빨간색 벽으로 둘러싸인 방에 들어섰다. 그때 나는 진홍색을 가장 좋아했다. '진홍'이라는 소리가 얼마나 멋졌던지! 꿈속에서 울고 있던 여자를 보지는 못했지만, 여자가 그 방 안에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나는 여자에게 말도 걸기 전에 진홍빛에 홀려 한쪽 벽으로 다가갔다. 나는 그제야 벽면이 액체라는 걸 깨달았다. 아직 벽에 페인트칠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벽에 손을 가져다 대자 내 손가락 사이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매번 그 순간에 나는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불을 켜고 책상 위의 지도와, 여전히 이따금 껴안고 자는 나의 유일한 동물 인형을 바라보았다. 열 세 살인 나를 누군가 아이라고 불렀다면 나는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를 이미 다 큰 청년이라고 느꼈다. 아직 내가 좋아하는 토끼 인형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하지만 인형이 없어도 난 충분히 잠을 잘 수 있었고, 혼자 힘으로 나를 지킬 수도 있었다. 핏빛 악몽을 꿀 때조차 인형을 침대까지 들고 가는 일은 기필코 없었다. 곁눈질로 날 보고 있는 토끼의 한쪽 눈은 다른 쪽 눈보다 처져 있었다. 난 토끼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그래도 다시 잠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악몽에 시달리는 밤이면 몹시 목이 타는 듯한 느낌으로 잠에서 깨곤 했다. 엄마가 침실용 탁자에 놓아 둔 물을 다 마셔 컵이 비었더라도, 부엌으로 가서 물을 더 마실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곳이 진짜 핏빛 꿈의 현장일 것 같아서 말이다.

    그때 나는 기분 전환 삼아 지도에서 여러 나라를 찾아보곤 했다. 가장 내 맘을 사로잡는 곳은 호주여서 그곳에 풍선껌 색깔을 칠해 두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세 동물, 코알라와 캥거루, 오리너구리도 모두 호주에 살았다.

    코알라가 가장 마음에 든 까닭은 코알라들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모습 때문이었다. 나는 나무를 안고 있는 코알라와 똑같은 모습으로 베개를 꼭 껴안고 있다가 불을 켜 둔 채 잠이 들곤 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꿈을 꾸는 것도 어쩌면 내가 크고 있다는 증거일지 모르겠다. 학교 친구들은 유령이나 뱀파이어 이야기를 좋아했다. 난 그런 걸 좋아하지 않는데도 계속해서 끔찍한 꿈을 꾸었다.

    다른 때보다 훨씬 더 겁에 질려 잠에서 깬 어느 날 밤, 내 손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을까 봐 두려워하며 전등을 켜고 두 손을 보았다. 하지만 양손엔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부터 있었던 잉크 자국뿐이었다. 내가 지도를 보며 먼 나라들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전에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복도 끝에 서 났다. 누가 들어도 엄마의 목소리였다.

    이번엔 용기를 내 방에서 나와 맨발로 엄마, 아빠의 침실로 갔다. 엄마의 슬픔이 내 악몽 따위보다는 중요했다.

    엄마와 아빠는 각자의 침대에서 따로 잠을 잤다. 달빛이 열린 커튼 사이로 들어와 창문 쪽에 있는 아빠의 침대를 비추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도 침대를 많이 봤지만, 이때처럼 충격을 받은 적은 없었다. 아빠가 그곳에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울고 있어서 내가 방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했다. 나는 아빠 침대로 가 이불을 잡아당긴 뒤 그 속으로 쑥 들어 갔다. 가죽과 화장품의 달콤한 냄새를 들이마시며 나는 이내 단잠에 빠졌다. 그날 밤보다 더 깊은 잠을 잔 적이 없을 정도로.

    다음 날 엄마는 아빠 침대에서 자는 나를 발견하고는 언짢아했다. 나는 몽유병 탓에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 거라고 둘러댔다.

    “맙소사. 몽유병에 걸린 아들이라니!”

    엄마는 소리를 질렀다.

    학교 가는 길에 내 동생 까르멘이 몽유병 환자라고 나를 놀려 댔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자면서도 걸을 수 있는지 자기한테도 가르쳐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까르멘은 열 살이었고, 내가 하는 말은 뭐든지 믿었다. 나는 내가 밤에 모이는 비밀 클럽 소속이며, 깨지 않고도 거리 여기저기를 활보하고 다닐 수 있다고 뻥을 쳤다.

    “클럽 이름이 뭔데?”

    까르멘이 물었다.

    "그림자 클럽.”

    나는 퍼뜩 떠오른 이름을 말해줬다.

    “나도 가도 돼?”

    “먼저 여러 가지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렇게 쉽지는 않아."

    내가 둘러댔다.

    까르멘은 자기도 밤에 깨워서 그림자 클럽에 데려가 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나는 그러겠노라고 대답은 했지만, 당연히 그럴 일은 없었다.

    몽유병에 걸린 내가 걱정된 엄마는 친구인 루스 아주머니에게 내 이야기를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에 살았다는 아주머니는 몽유병에 걸린 아이보다 더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일을 많이 목격했다고 했다. 루스 아주머니와 전화를 하면, 엄마는 자신의 문제보다 훨씬 심각한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누그러지곤 했다. 우리 인생이 완벽하진 않지만 적어도 폭격을 당한 건 아니니까 말이다.

    학교에서 돌아온 어느 날, 엄마는 루스 아주머니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매시트포테이토 냄새가 났다. 이번엔 아주머니의 참혹한 이야기도 엄마를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가방을 내 방에 놓고는 화장실로 달려가 손을 씻었다(짜증 나는 잉크 자국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늘 문제의 시작을 알리는 맛있는 냄새를 쫓아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문지방에 우뚝 걸음을 멈추고 엄마가 숨 죽여 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학교에 있는 동안 내내 머리에서 맴돌았던 질문을 던졌다.

    "아빠는 어디 있어요?"

    엄마는 눈물 너머로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마치 내가 아름답지만, 폐허가 된 풍경인 것처럼.

    "이야기 좀 하자."

    엄마는 계속 감자를 으깨다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가 사방으로 마구 흩어졌고 급기야는 재가 으깬 감자 속으로 떨어졌다.

    나는 엄마가 입을 열 때까지 조각상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네 아빠는 당분간 우리랑 다른 집에서 살 거란다. 원룸을 하나 얻었대. 할 일이 많은데 우리가 너무 시끄럽단다. 여기 일을 다 마치면 파리로 가서 다리를 건설할 계획이라더라."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빠가 다시는 달빛 아래 자신의 침대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엄마는 무릎을 꿇으며 나를 껴안았다. 엄마는 지금까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이런 식으로 나를 꽉 껴안은 적이 없었다.

    “후아니또, 너에겐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엄마가 내게 말했다.

    엄마가 날 후아니또라고 부를 때면 언제나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그건 사랑스러운 이름이 아니라 위기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매시트포테이토 같은 이름이었다.

    나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무섭다기보다,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이 들었다. 나는 엄마가 우리 학교에 왔을 때처럼 미소짓기를 바랐다. 우리 엄마는 모든 엄마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웠다.

    “걱정 마세요. 내가 여기 엄마 곁에 있을게요." 내가 대답했다.

    그 말이 내가 엄마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말이었나 보다. 엄마는 나를 꽉 껴안으며 어느 때보다 많이 울었다. 어찌나 오랫동안 껴안고 있었던지 담뱃재가 빠진 매시트포테이토가 불 위에서 타고 있었다.

    동생이 피아노 수업을 끝내고 집에 왔을 때 엄마와 나는 피자를 먹고 있었다. 동생에게 그날 오후는 몹시 신나는 시간이었다. 엄마가 그다지 먹고 싶지 않다며 까르멘더러 양껏 먹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너희 둘에게 할 말이 있단다.”

    엄마는 또박또박 말했다.

    “아빠가 여행을 가셨어."

    아빠가 여행 선물로 인형을 사 가지고 올 것이라 기대하는 까르멘에게 엄마의 말은 단지 근사하게 들릴 뿐이었다.

    나는 진실도 모른 채 마냥 기뻐하는 동생을 보며 슬픔에 빠졌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동생이 알지 못하게 할 작정이었다.

    그 당시에 이혼이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내 친구 중 부모가 이혼한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 다. 두 집을 오가며 양쪽에서 자신이 원하는 걸 모두 받아 챙기면서 신나게 지내는 소년에 대한 영화를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빠는 큰 소리로 싸우지도 않았고, 사랑한다는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 서로 입맞춤을 하거나 손을 잡은 적도 없었다.

    어느 날 오후, 아빠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뒤적거리다, 어떤 책 안에서 아주 멋진 그림이 그려진 봉투를 발견했다. 분홍색 나선형 모형과 푸른색 별 모양, 초록색 번개 그림이 봉투를 덮고 있었다. 마치 로큰롤 앨범 재킷 같았다.

    봉투 안에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건 아빠를 아주 사랑한다는 아빠의 여자 친구가 보낸 편지였다. 그 아주머니는 아빠와 파리로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나는 명치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으로 그 편지를 엄마에게 주었다.

    매시트포테이토가 타 버리기 두 달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가끔 나는 엄마가 슬퍼진 게 내 잘못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엄마에게 그 끔찍한 편지를 전달한 탓에 벌어진 일이었으니 말이다.

    "이혼할 거예요?"

    까르멘이 우리 말을 안 듣는 틈을 타 내가 엄마에게 물었다.

    난 영화의 그 소년처럼 두 집을 오가며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난 절대로 아빠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다만 엄마가 만족스러워하던 삶으로 되돌아가길 원했을 뿐이었다.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아빠는 엄마를 아주 많이 사랑하잖아요. 중요한 건 그거잖아요."

    나는 아빠가 나를 사랑하든 아니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엄마를 사랑하기만 바랐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중요한 선서를 했다. 지도를 가져온 다음, 호주에 걸고 맹세코 우리 집에 행복이 돌아올 거라고 굳게 다짐했다. 그 행복을 얻으려고 내가 엄청난 노력을 해야한대도 상관없었다.

    그날 밤, 난 악몽을 꾸지 않았다. 하지만 잠을 이루지도 못했다.

    나는 엄마, 아빠가 쓰던 방으로 갔다. 이제 더 이상 침대 하나는 필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내 생각엔 침대가 남아돌았다. 막 그곳에 누우려다가 나는 까르멘이 선수를 쳤다는 사실을 알았다. 언제나처럼 까르멘은 득의만만한 표정이었다. 어쩌면 그림자 클럽에 들어간 꿈을 꾸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