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가 기도이고 꽃이다
 
지은이 : 나태주
출판사 : 열림원
출판일 : 2026년 07월




  • 세 줄의 시 「풀꽃」으로 수많은 독자의 마음을 울리며 ‘풀꽃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사랑받아 온 나태주.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그는 꽃과 풀, 바람과 하늘 같은 일상의 풍경을 통해 삶과 사랑, 사람의 존재를 노래해 왔다. 이번 꽃시집은 나태주 시인이 오랜 세월 써 온 꽃 시편들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에 따라 새롭게 엮은 시선집이다.            



    우리는 서로가 기도이고 꽃이다


    서문
    시님에게 꾸뻑, 꽃님에게 꾸뻑!
    꽃은 나에게 식물이기도 하고 인간이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꽃은 식물보다 인간에 가깝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 소망스러운 것, 아름다운 것 모두가 꽃에 비유되기도 하니까요. 그렇군요. 시는 처음부터 비유 체계군요.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소망스러운 것은 모두가 꽃이군요.

    꽃은 그 자체로서 존재 이유를 지니고 있고 최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그랬을까요. 나는 어려서부터 꽃이 좋았습니다. 그냥 좋았습니다. 어쩌면 꽃에 홀린 아이였다 그럴까요. 꽃을 보면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졌고 꽃을 보면 마음속이 저절로 밝아졌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무던히 꽃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서투른 솜씨로나마 연필로 꽃 그림을 그렸고 또 시로 쓰기도 했습니다. 한두 편이 아니지요. 아주 많은 꽃 시를 썼지요. 그러다가 「풀꽃」이라는 시도 쓰기도 했지만 어쨌든 꽃을 좋아하는 마음은 아주 많은 시로 보답받은 셈입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요!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내가 그동안 쓴 시 가운데 꽃을 소재로 해서 쓴 시들만 모은 시집입니다. "꽃시집"이지요. 꽃을 좋아하고 사랑한 나머지 받은 대가지고서는 엄청난 대가입니다. 꽃한테 감사하고 또한 시에게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시님에게 꾸뻑, 꽃님에게, 꾸뻑!

    2026년 여름에
    나태주 씁니다.


    서시_꽃을 피우자
    봄이 오니
    화를 냈던 일
    부끄러워진다
    슬퍼했던 일
    미안해진다

    꽃이 피니
    미워했던 일
    뉘우쳐진다
    짜증 냈던 일
    속상해진다

    나도 분명 꽃인데
    나만 그걸
    몰랐던 거다
    봄이다 이제
    너도 꽃을 피워라.


    봄꽃-보이지 않는 꽃처럼
    자목련꽃 필 무렵
    자목련꽃 필 무렵 부는 바람은
    연한 토끼풀꽃 내음과 쑥 내음이
    스며 있어서

    오래 앉아 누운 사람조차
    마당으로 나와 서성이게 하고
    오래 오지 않던 흰 구름도
    그 마당 가에 오게 하여
    그 사람과 오랜만에 만나게 하고

    깔깔깔 깔깔깔
    열여섯 열일곱 그 또래의 계집애들
    웃음소리도 조금은 숨어서 있다

    울 어머니 소싯적
    대청마루 나와 앉아
    수틀에 수를 놓고 계시던
    반듯한 이마의 가르맛길도
    약간은 바래져서 어리어 있다
    약간은 자부름에 겨워서 어리어 있다.


    산수유
    아프지만 다시 봄

    그래도 시작하는 거야
    다시 먼 길 떠나 보는 거야

    어떠한 경우에도 나는
    네 편이란다.


    제비꽃 옆에
    잊고는 살았지만
    아주는 잊고
    살았던 건 아니다

    해마다 제비꽃
    다시 필 때면
    그리움 살아오곤 하던
    짙은 바다 물빛

    뿐이라 바람에
    가늘게 떨면서
    흐느껴 울기도
    했을 것이다.


    제비꽃 1
    그대 떠난 자리에
    나 혼자 남아
    쓸쓸한 날
    제비꽃이 피었습니다
    다른 날보다 더 예쁘게
    피었습니다.


    제비꽃 2
    아직도 나를 기다려
    고개 숙인 철부지 소녀.


    다시 제비꽃
    너를 알고 난 다음부터
    눈이 작은 여자가 좋았다
    키 작은 여자도 좋았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했다

    짧은 봄이 오래도록 떠나지 않았다.


    벚꽃 만개
    너와 함께 꽃구경하던 날이
    언제였던가

    너 없이 혼자 꽃구경하던 날이
    또 몇 해였던가.


    노랑
    딸아이를 생각하며 꽃을 샀다

    지금은 먼 곳에 있어
    꽃을 받을 수 없는 그 아이

    우리는 비탈길을 걸으면서
    다리가 후들거렸지

    딸아이 방에 꽃을 꽂아 본다

    빈방이 화들짝
    잠에서 깨어난다

    봄이다, 프리지어.


    민들레 시학
    몸이 무거워
    제 어미 나무 밑에
    툭 떨어지는 분꽃 씨앗

    씨앗 주머니를 탁 터뜨려
    제법 멀리까지
    가기는 하는 봉숭아 씨앗

    그보다 현명하고 유능하기론
    깃털 씨앗으로 가볍게
    가볍게 바람 타고

    제 어미가 알지도 못하는
    곳까지 가서 씩씩하게 싹을 틔워
    꽃을 피우는 민들레 씨앗

    시여, 사람의 시여
    그대도 민들레 씨앗을 닮아
    될수록 가볍게 멀리, 멀리까지 가라

    가서 거기 시인이 모르는 사람들
    가슴에 내려 꽃을 피우고
    끝내 꽃밭을 이뤄다오.


    여름꽃-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개망초
    학명은 개망초, 사전에도 그렇게 나온다. 내가 어려서는 풍년초라 불렀고 더러는 담배나물이라 불렀다. 풍년 들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그런 이름을 생각해 내게 했고 담배가 귀하던 시절이라 그리 불렀던가 보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똑같은 풀을 계란꽃이라 부른다. 새하얀 꽃판이 계란의 흰자같이 보이고 노오란 꽃심이 노른자로 보였던 모양이다. 이거야말로 계란이 귀하고 귀하던 우리들 어린 날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꿈이요, 유추(類推)가 아니던가. 하나의 꽃, 꽃 이름을 두고서도 생각하는 바 꿈꾸는 바가 참으로 멀고도 가깝다.


    메꽃
    마바람이 몹시 불어 미루나무 숲에서 샘물 퍼내는 두레박 소리가 나는 밤, 그때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청개구리 떼를 지어 목을 놓아 우는 밤에, 애기를 낳지 못하는 아내를 위하여 아내와 함께 울었다. 무엇으로도 부족할 것이 없는 당신이 나 때문에 부족한 사람이 되었으니, 다른 여자 얻어서 애 낳고 살라고, 그렇지만 아주 헤어질 수는 없고 서울에다 전세방 하나 얻어 주고 생활비 대 주고 한 달에 두어 번만 찾아와 준다면, 그것으로 자족하고 살아가겠으니 물러나겠노라 앙탈하는 아내를 달래다가, 나도 그만 아내 따라 울고 말았다.

    어디 그게 할 말이나 되냐고, 첫아기 잘못되어 여러 번 수술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 어디 그게 당신 죄냐고 차마 그럴 수는 없는 일이라고, 그러느니 차라리 영아원에 가서 아이 하나 데려다 기르며 같이 살자고, 왜 이런 슬픔이 우리 것이어야만 하느냐고, 남들이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더욱 작은 울음소리로 느껴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다.

    자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 흙담을 타고 올라가 메꽃 한 송이 피어 있는 게, 그날따라 아프게 눈에 띄었다. 밤사이 우리 울음을 몰래몰래 훔쳐 먹고 우리 눈물을 가만가만 받아먹고, 꺼질 듯한 한숨으로 발가벗은 황토흙담 위에 피어서 바람에 날리는 메꽃. 그러고 보니 아내 얼굴 또한 누르띵띵하니 부은 게 메꽃같이 보였다. 하긴 아내 눈에 내 얼굴도 메꽃쯤으로 보였으리라. 메꽃! 너, 버려진 땅 아무 데서나 자라, 하루아침 한때를 분단장하고 피었다가, 이내 시들고 마는 푸새. 담홍빛 슬픔의 찌꺼기여.


    겨울꽃-너를 사랑해서 슬프다
    겨울에도 꽃 핀다
    온다 온다 하면서도
    못 온다
    간다 간다 하면서도
    못 간다

    그래도 좋아
    너는 여전히
    내 마음속에 와서 살고
    나도 여전히
    네 마음속에 가서
    살고 있을 테니까

    이제 또다시 겨울
    그래도 나는
    꽃을 피운다

    네 생각으로 순간순간
    꽃을 피운다

    너도 부디 꽃을 피워라
    세상에는 없는 꽃
    아무도 모르는 꽃
    아직은 이름도 없는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