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흑
 
지은이 : 김뉘연
출판사 : 열림원
출판일 : 2026년 06월



  • “흰색에 흑색을 더하면 흰흑색이 된다”라는 낯선 지침으로 시작하는 『흰흑』은 관계-맺기의 공간으로서의 ‘빈칸’을 더욱 급진적인 방식으로 제시한다. 시인에 따르면, 흰색과 흑색은 만나 회색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자명하다고 여겨온 ‘회색’의 사전적 정의가 지닌 한계를 마주하는 순간 ‘흰흑색’이라는 불가능한 공간이 탄생한다. 



    흰흑


    청색
    이것과 완전히 다른 이것이 있고, 이것과 어느 정도 다른 이것이 있다. 이것과 완전히 다른 이것은 애초에 이것과 별개로, 굳이 이것과 다르다고 말할 필요가 없는 단독의 상태이다. 그러므로 완전히 다른 이것을 이곳으로 끌어와 이것과 완전히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당연함에 이른다. 이것은 이것이고, 이것은 이것이다.

    이곳은 이곳이고.

    이것과 어느 정도 다른 이것이 있고, 이것과 완전히 다른 이것이 있다. 이것과 어느 정도 다른 이것은 과연 어느 정도 다른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느 정도란 과연 어느 정도인 것이며, 어느 정도 다르다는 것은 어느 정도 같기도 하다는, 그러니 이것과 어느 정도 다른 이것은 이것과 어느 정도 같은 것,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도, 말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이것이 있고, 다른 이것이 있다. 다른 이것과 다른 이것은 같다. 다른 이것과 다른 이것은 다르다.

    이곳.
    계속됨.


    갈색
    이 글은 어느 도시의 모처에서 며칠간 열리는 이 모의 전시를 위해 쓰였다. 이 전시는 이 모가 여러 가지 이용해 만든 구체적인 형상을 선보인다. 구체적인 형상은 하나의 형상과 또 하나의 형상이 결합되어 하나의 작품을 이루거나, 하나의 형상과 또 하나의 형상으로 분리되어 하나의 작품을 이룬다. 결합된 상태와 분리된 상태는 관계라는 상황을 획득한 채이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상황으로 제시될 뿐 어떠한 관계로 읽히지 않는다. 하나의 형상은 또 하나의 형상을 설명하지 않고, 또 하나의 형상은 하나의 형상을 설명하지 않는다. 하나의 형상은 또 하나의 형상을 연상시키지 않고, 또 하나의 형상은 하나의 형상을 연상시키지 않는다. 서로의 연관됨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형상과 형상은 그와 무관히 구체적인 형상을 이루는 데 도달해 있으며 그렇게 전시를 이룬다. 구체적인 형상이 여러 가지 재료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재료와 재료가 결합되거나 분리되면서 형상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재료 역시 또 하나의 재료와 관계라는 상황을 이루지만 어떠한 관계로 읽히지 않고, 서로의 연관됨을 거부하는 것처럼까지 보이지는 않지만 역시 그와 무관히 형상을 이루는 데 도달해 있으며, 형상과 함께 전시를 이루는 역할을 한다. 전시는 재료와 형상을 통합하며, 글은 전시를 조망한다.


    청색
    가스라이터를 바지에 넣고 세탁기를 돌렸다. 건조대에 널면서 알게 됨. 창문으로 자전거 거치대가 보인다. 그 뒤로 담. 고양이가 지나간다! 바짝 세운 꼬리. 자전거 몇 대. 크고 작은 바퀴. 개미가 지나가고 있을 것. 돌을 보면 쌓고 싶다. 전봇대의 높이는 모두 동일한가? 자동차가 지나간다. 교복이 지나간다. 소매가 지나간다. 단추가 지나간다. 운동화가 지나간다. 배낭의 열쇠고리가 흔들리네. 고양이가 지나간다! 개가 지나간다! 짧아 보이는 꼬리. 팽팽한 끈. 비닐봉지가 묵직해 보인다. 전봇대의 높이는 모두 동일한가? 오줌이 도로를 적신다. 돌을 보면 쌓고 싶다. 자동차가 다가온다. 바퀴가 굴러간다. 자동차가 지나간다. 바퀴가 굴러갔다. 지나가는 자전거를 따라가본다. 신호등에 걸려 서 있음. 횡단보도를 건너게 될까, 건너지 않을까. 빵집에 가게 될까, 가지 않을까. 모자를 쓰고 나왔던 것 같은데. 전봇대의 높이는 모두 동일한가? 아이가 웃는다.


    이 사람
    이 사람은 건넌다. 건넌 뒤. 그걸 봤다. 본 것. 이 사람은 남겨졌다. 남긴 것. 그걸 든다. 그게 들렸다. 그걸 쓴다. 쓰고 간다. 이 사람은. 가고 있다. 흔들린다. 흔들린 것. 그걸 멈췄다. 멈춘 것. 이 사람이. 흔든 것. 이 사람을. 흔든 것 흔들린 것. 남긴 것 남겨진 것 흔든 것. 흔들린 것 남긴 것. 쓰인 것. 들린 것. 그걸 들었다. 그걸 썼다. 건너간 사람. 남은 사람. 건넨 사람. 받은 사람. 들어 던짐. 던져 받음. 받은 것. 흔들렸던. 남게 된. 들렸던. 그걸 들었다고 했다. 들어 던졌다고. 이 사람이 던졌다. 던진 사람이 던져졌다. 던져진 사람이다. 그걸 사람이라고 했다. 건너간 것. 본 사람. 들린 사람. 든 것. 흔든다. 흔들렸다. 그걸 본다. 보고 있다.


    저 사람
    저 사람을 만난다. 
    저 사람이 뛰고 있고, 함께 뛰기 시작한다. 
    저 사람이 멈춘다. 
    저 사람이 운다. 
    나는 컵을 든다. 
    저 사람이 세면대로 향한다. 
    저 사람이 기침을 한다. 
    여기는 운동장이다. 
    컵은 텀블러이다. 
    세면대에서, 물이 나오지 않는다. 
    물이 닫혀 있다. 
    저 사람이 계속 기침을 한다. 
    그렇게 운다. 
    기침은 눈물이다. 
    눈물은 땀이다. 
    열린 물. 
    내가 손수건을 꺼낸다. 
    호주머니에서. 
    옷에 호주머니가 하나 달린다. 
    내 옷. 
    손수건을 건네받는다. 
    저 사람. 
    내 손수건. 
    손이 수건을 만난다.
    흘러내리는 손수건.
    흐르는 물.
    담긴 물.
    세면대가 움직였다.
    저 사람도. 나도.
    손수건도.
    나는 호주머니 달린 옷을 펄럭여본다. 작은 바람을 만든다.
    저 사람이 손수건을 펼친다.
    작은 바람이다.
    작은 바람을 나눈다.
    여기. 저기.
    요기.
    저 사람은 나를 만난 적이 있다. 바람이 그것을 불러온다.
    나도 저 사람을.
    나는 물을 마시기로 한다. 저 사람은 얼굴을 씻기로 한다.
    손수건이 저 사람의 얼굴을 덮는다.
    그것을 떼어낸다.


    말의 넘침
    말은 곧잘 넘쳐 흐른다. 말에 적당한 크기의 그릇이 있는 것처럼 쓴다. 그릇이라면 적지 않다. 익숙하지 않은 단어 몇 개를 고라 종지에 담는다. 단어와 단어가 어색하게 조합된 문구를 떼어 접시에 올린다. 쟁반을 꺼내 그 위에 종지와 접시를 두고, 아끼는 컵을 꺼낸다. 고라둔 긴 문장을 음절별로 분리해 뒤섞어 컵에 담는다. 막 도착한 그에게 쟁반째 대접한다. 그를 급히 맞이하느라 넘어질 뻔하고, 음소가 튀어나오면서, 뒤섞인 음절 하나가 컵 표면에 묻는다. 그는 거기서부터 입을 댄다. 그리고 편식한다.


    시원찮은 결과
    같은 곳에 머물러 있다. 이어진, 그런 것을 이어졌다고 말할 수 있나, 단속적인 연결 비슷한 상태로, 계속되고는 있는, 오른손이 위로 올라가 있고 아래에 입이 달린, 달린 그것이 열릴 때마다 쏟아지는 거짓말, 거짓과 진실이 뒤섞여 순수한 거짓조차 되지 못하는 종류의, 위로 올라간 오른손은 만사를 모른 체하고, 오른손을 모른 체하는 왼손은 제 갈 길을 가는, 양손 없는 자의 모습, 시작된 말을 다르게 끝맺고, 그렇게 두 가지 이상의 주장을 펼치며, 모순으로 편견을 조장하는, 남의 말을 하고, 남의 말을 다시 하는 입안, 거기 달린 혀가, 매달린 입안을 떠나지 않는다.


    청색
    이 전시는 어느 도시의 모처에서 며칠간 읽힐 이 모의 글을 위해 열렸다. 이 글은 이 모가 여러 가지 재료를 이용해 만든 구체적인 형상을 선보인다. 구체적인 형상은 하나의 형상과 또 하나의 형상이 결합되어 하나의 작품을 이루거나, 하나의 형상과 또 하나의 형상으로 분리되어 하나의 작품을 이룬다. 결합된 상태와 분리된 상태는 관계라는 상황을 획득한 채이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상황으로 제시될 뿐 어떠한 관계로 읽히지 않는다. 하나의 형상은 또 하나의 형상을 설명하지 않고, 또 하나의 형상은 하나의 형상을 설명하지 않는다. 하나의 형상은 또 하나의 형상을 연상시키지 않고, 또 하나의 형상은 하나의 형상을 연상시키지 않는다. 서로의 연관됨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형상과 형상은 그와 무관히 구체적인 형상을 이루는 데 도달해 있으며 그렇게 글을 이룬다. 구체적인 형상이 여러 가지 재료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재료와 재료가 결합되거나 분리되면서 형상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재료 역시 또 하나의 재료와 관계라는 상황을 이루지만 어떠한 관계로 읽히지 않고, 서로의 연관됨을 거부하는 것처럼까지 보이지는 않지만 역시 그와 무관히 형상을 이루는 데 도달해 있으며, 형상과 함께 글을 이루는 역할을 한다. 글은 재료와 형상을 통합하며, 전시는 글을
    조망한다.


    갈색
    이곳의 계속됨은 이곳의 이곳 됨과 무관하다. 이곳이 계속된다는 사실이 이곳을 계속해서 이곳으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이곳을 이곳으로 만드는 것은 이곳으로, 이곳은 이곳으로 있음으로 이곳을 이루었다.

    이곳의 계속됨은 이곳의 이다음이다. 그런 것을 계속된다고 말한다.

    계속됨.
    이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