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햇빛 일기
 
지은이 : 이해인
출판사 : 열림원(도서출판)
출판일 : 2026년 07월



  • 반세기 넘게 맑고 따뜻한 시로 독자 곁을 지켜 온 이해인 수녀가 이번에는 손으로 쓰며 마음에 새기는 시 읽기를 제안한다. 투병 중에도 하루하루 써 내려간 시들을 엮은 『이해인의 햇빛 일기』를 바탕으로 한 이 필사 노트는, 한 글자 한 글자 시를 따라 적는 동안 몸과 마음에 잔잔한 평온이 스며드는 시간을 선사한다.                                                           



    필사 햇빛 일기


    1. 비 오는 날

    햇빛 일기 2
    오늘도
    어서 오세요
    비 온 뒤에 만나니
    더욱 반갑네요

    바다 위로
    떠오르는 해를 향해
    잔뜩 설레는 마음으로
    손 흔드는 아침

    햇빛으로
    얼굴을 씻고
    손을 씻고
    마음을 씻고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도 내게
    햇빛으로 웃어 줄 것이라
    미리 미리
    행복합니다.

    작은 결심
    세상에 머물
    생의 길이가
    조금씩 더 짧아질수록

    나는
    마음의 날씨를
    밝게 가꾸고
    변덕을 피해야겠다

    사랑의 폭을
    관대함으로
    넓혀 가야겠다

    새롭게 만나는
    시간의 결을
    조심조심
    맑고 곱게
    가꾸어 가야겠다

    그리고
    기도의 지향을
    단단하게 정해야겠다
    오늘은
    이 결심만으로도
    충분하고 충분하다.

    여름 일기 - 비의 말
    한바탕 큰 소리로
    한꺼번에 쏟아지는 소나기는
    나에게
    이왕이면 망설임 없이
    큰 열정으로
    사랑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고

    소곤소곤
    종일토록 조용히 내리는 보슬비는
    나에게 큰 열정도 좋지만
    가만히 은은히
    조금씩 스며드는
    꾸준한 사랑 또한
    아름다운 거라고 전해 주네

    둘 다 맞다
    알았다
    고개 끄덕이며
    비를 더욱 사랑하는
    나의 여름날들.

    열매를 줍다
    하루 종일
    무언가를 줍는 날은
    행복하다

    우리 집 뜨락의
    매실 보리수
    살구 자두

    익고 익어서
    저절로 떨어진
    자유의 몸짓

    누가 안 보는 사이
    바람에게만 들키며
    살짝 다가가
    떨어진 열매를 줍는 날은
    괜히 웃음이 난다

    누구라도 용서하고 싶어진다

    모르는 이들도
    정다운 친구로 초대해
    잔치를 하고 싶다
    살구나무
    자두나무 아래서.

    어떤 보물
    세상에서 다 드러내 놓고
    말하지 못한
    내 마음속의 언어들

    깨고 나서
    더러는 잊었지만
    결코 잊고 싶지 않던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꿈들
    모르는 이웃과도 웃으며
    사랑의 집을 지었던
    행복한 순간들

    속으로 하얀 피 흘렸지만
    끝까지 잘 견디어
    한 송이 꽃이 되고
    열매로 익은 나의 고통들

    살아서도 죽어서도
    나의 보물이라
    외치고 싶어

    그리 무겁진 않으니까
    하늘나라 여행에도
    꼭 가져가고 싶어.


    2. 햇빛 향기

    햇빛 향기
    오랜 장마 끝에
    마당에 나가
    빨래를 널다
    처음으로 만난
    햇빛의 고요
    햇빛의 만남

    하도 황홀하여 눈이 멀 뻔했네

    다시 한 번
    살아 있는 기쁨
    숨을 쉬는 희망

    자꾸자꾸 웃음이 나오네

    아아 이제
    내 남은 시간들을

    어찌 살라고
    햇빛은 저리도 눈부신지!

    손님맞이
    손님들을 만나기 전엔
    왠지 조금
    긴장이 되지요

    마음의 창을 열고
    이야길 나누며
    차를 마시는 사이
    어느새 우리는
    처음 보아도
    낯설지 않은
    친구수가 됩니다
    기도를 약속하는
    가족이 됩니다

    각기 다른 모습의 손님들을
    한 송이 꽃이라고 생각하며
    조심조심 예를 갖춰

    정성껏 대해 주면
    그들만의 고운 향기를
    남겨 놓고 떠납니다

    나는 가만히
    뒷정리를 하며
    헤어지고 나서도
    환대의 미소를
    먼 데까지 날려 보냅니다.


    3. 꿈 일기

    햇빛 주사
    병원에서 링거 주사를 맞듯이
    내 몸이 힘들고 우울할 땐
    햇빛 주사를 자주 맞는다

    차가운 몸이 이내 따뜻해지고
    우울한 맘이 내 밝아지는
    햇빛 한 줄기의 주사

    고맙다고 고맙다고
    목례를 하면
    먼 곳에 있는 해님이
    다정히 웃는다

    복도를 걸어갈 때도
    두꺼운 유리창을 뚫고 들어와
    나를
    생명의 빛으로 초대하는
    나의 햇빛 한 줄기로

    나는 하루를
    시작한다
    햇빛이 준
    넉넉한 양분으로
    나는
    나에게
    이웃에게
    둥근 사랑을
    시작한다.


    4. 좀 어떠세요?

    바닷가에서
    오늘은
    맨발로
    바닷가를 거닐었습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한 번은 하느님의 통곡으로
    한 번은 당신의 울음으로 들렸습니다

    삶이 피곤하고
    기댈 데가 없는 섬이라고
    우리가 한 번씩 푸념할 적마다
    쓸쓸함의 해초도
    더 깊이 자라는 걸 보았습니다

    밀물이 들어오며 하는 말
    감당 못 할 열정으로
    삶을 끌어안아 보십시오

    썰물이 나가면서 하는 말
    놓아 버릴 욕심들은
    미루지 말고 버리십시오

    바다가 모래 위에 엎질러 놓은
    많은 말을 다 전할 순 없어도
    마음에 출렁이는 푸른 그리움을
    당신께 선물로 드릴게요

    언젠가는 우리 모두
    슬픔이 없는 바닷가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로
    춤추는 물새로 만나는 꿈을 꾸며
    큰 바다를 번쩍 들고 왔습니다.


    5. 어느 날 꽃과의 대화

    햇빛 일기 1
    오늘도
    한 줄기 햇빛이
    고맙고 고마운
    위로가 되네

    살아갈수록
    마음은 따뜻해도
    몸이 추워서
    얼음인 나에게

    햇빛은
    내가
    아직 가 보지 않은
    천상의
    밝고 맑은 말을
    안고 와
    포근히
    앉아서
    나를 웃게 만들지

    또
    하루를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