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야기
 
지은이 : 스기마타 미호코 (지은이), 서수지 (옮긴이)
출판사 : 사람과나무사이
출판일 : 2026년 07월




  • 탄생부터 죽음까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일생을 촘촘히 따라가는 동시에 회화·조각·해부학·건축·병기 개발·비행 연구까지 그가 손댄 모든 작업을 한 권에 담았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당신은 ‘만능 천재’라는 딱지 뒤에 숨어 있던 놀랍도록 인간적이고 유쾌했던 레오나르도를 만나는 신선한 ‘지적 충격’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야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애
    소년 레오나르도
    레오나르도의 탄생
    1452년 4월 15일 토요일
    밤 10시 반 무렵
    빈치 마을에서......

    레오나르도는 부모님이 정식으로 혼인하지 않은 상태라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러나 할아버지 안토니오는 첫 손자인 레오나르도의 탄생을 기뻐하며, 생년월일과 시간을 자기 아들(피에로)의 출생 기록에 이어 적어두었다. 이 기록은 안토니오의 할아버지 귀도가 사용했던 업무 기록부에 적혀 있었다. 이는 1930년대가 되어서야 발견되었다.

    레오나르도가 태어난 해에 아버지 세르 피에로는 레오나르도의 어머니 카테리나가 아닌 다른 여성과 결혼했다. 그리고 일을 위해 피렌체로 생활 거점을 옮겨, 빈치 마을에는 거의 오지 않았다.

    어머니 카테리나도 레오나르도를 낳고 2년 뒤에 결혼해서 큰딸을 낳아 적어도 두 살 이후로는 레오나르도를 거의 돌보지 않았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부족한 부모님의 사랑을 채워주듯 레오나르도에게는 사랑을 듬뿍 쏟아주는 안토니오 할아버지와 프란체스코 삼촌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번듯한 직업을 가진 적이 없다’고 관공서에 보고될 정도로 연줄과 재산이 있는 자유인으로, 자신들이 가진 농지를 순회하는 일 외에 일다운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레오나르도로는 속박과는 인연이 먼 두 자유인 손에 자라며, 풍요로운 자연에 둘러싸여 빈치 마을에서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은 발상, 자연 친화적인 마음, 직접 눈으로 관찰하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을 것이다.

    대대로 공증인 집안이란
    공증인이란 계약서 등의 문서에 서명하여 그 문서의 진정성과 법적 효력을 보증하는 직업으로, 오늘날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직종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공증인은 라틴어 소양을 갖춘 교양 있는 엘리트의 전유물로, 누구나 부러워하던 직업이었다.

    다빈치 가문은 레오나르도 대까지(할아버지를 제외하고) 대대로 이어온 공증인 집안으로, 그중에는 피렌체 공화국 정부 내에서 활동한 조상도 있을 정도여서 시골인 빈치 마을에서는 명문가로 통했다. ‘세르(Ser)’란 공증인을 의미하는 존칭으로, 대대로 이름 앞에 세르를 붙였다. 그런데 레오나르도의 할아버지 안토니오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직접을 갖지 않아 명예로운 ‘대대로 공증인 집안’이라는 가문의 명맥이 끊기고 말았다. 하지만 그 아들 피에로가 이 전통을 부활시켰다. 일반적이라면 피에로의 큰아들 레오나르도가 가업을 물려받아야 했다. 그러나 공증인 조합의 규약은 사생아가 이 직종에 종사하는 것을 금했기에 레오나르도의 배다른 형제인 줄리아노가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레오나르도가 태어난 ‘빈치 마을’이란
    빈치 마을은 피렌체 북서쪽에 자리 잡은 토스카나의 시골에 있다. 지금도 전철이 다니지 않아 가장 가까운 역인 엠폴리역에서 버스로 20분가량 걸린다. 몬탈바노 언덕과 빈치오강(아르노강의 지류)으로 이루어진 풍요로운 자연에 둘러싸인 빈치 마을 주변은 지금도 예스러운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레오나르도의 가문은 빈치 마을에서 대대로 이어진 집안으로, 레오나르도로부터 5대 전인 미켈레가 '빈치 마을 출신'이라는 뜻의 '다빈치(Da Vinci)'를 성으로 쓰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일터가 있는 피렌체에 살다가 휴가철에는 빈치 마을로 돌아오는 생활이 그 시대부터 이어져 왔다.

    아버지 세르 피에로를 따라 대도시 피렌체에 가본 적이 있을 수도 있지만, 레오나르도는 유소년기 대부분을 빈치 마을에서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할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경작지와 포도밭을 돌아다니면서 농촌 생활을 어깨너머로 보며 자라났다.

    사생아로 태어났다는 것의 의미
    레오나르도는 아버지 세르 피에로와 어머니 카테리나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아 사생아로 태어났다. 사생아는 이탈리아어로 ‘나투랄레(naturale: 자연의, 사생의)’라고도 불렸는데, 당시 드문 존재는 아니었으나 가족과 사회의 대우가 정식 후계자와는 역시 달랐던 모양이다. 예를 들어 공증인같이 엘리트 의식이 강하고 ‘격식과 정통’을 중시하는 직업의 조합 규약에는 사생아 금지 조항이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처음부터 아버지의 뒤를 이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사생아인데도 이름을 날린 인물이 적지 않았다. 르네상스 초기의 팔방미인 중 한 사람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이탈리아 통일을 계획했던 체사레 보르자, 교황의 자리에까지 오른 클레멘스 7세, 화가인 필리피노 리피 등 능력만 있으면 대성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도 않은 시대였다. 그래도 명문가뿐 아니라 일반 가정 출신이라도 사생아는 재산 상속권이 없고, 부양 공제 대상에서 제외되며, 직업의 제약이 있는 등 이런저런 걸림돌에 앞길이 가로막히곤 했다.

    청년 레오나르도
    베로키오 공방에 들어가다
    레오나르도가 언제 빈치 마을을 나와 피렌체로 이주했는지, 또 몇 살부터 공방에 들어가 수업을 받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당시 14~15세에 수제자로 들어가는 게 일반적이었기에, 레오나르도도 그 무렵(1466~1467년) 베로키오 공방에 입문했을 것이다. 훗날 레오나르도의 전기를 쓴 조르조 바사리는 레오나르도가 그린 데생을 아버지 세르 피에로가 베로키오에게 직접 들고 가 보여주었다고 적었다. 사생아라서 공증인으로 대를 이을 수는 없었는데 세르 피에로는 아들의 자질을 정확히 알아보고 그 재능을 가장 잘 꽃피울 수 있는 예술의 길을 열어주었다.

    베로키오 공방은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번성한 곳으로, 최고 수준의 예술가를 여럿 배출한 명실상부한 일류 공방이었다. 세르 피에로가 아들을 그저 그런 공방이 아닌 베로키오 공방에 들여보낸 것은 훗날 만능 천재로 이름을 떨치는 대예술가 레오나르도가 탄생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대체로 야박한 인물로 그려지는 세르 피에로지만 아들 레오나르도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주춧돌을 놓아준 이는 바로 그였다.

    드디어 홀로 서다, 장인으로서의 첫 임무
    파치 가문의 음모가 발생한 1478년 초, 레오나르도는 단독으로는 최초로 일감을 수주했다. 의뢰인은 피렌체 정부였다. 의뢰한 그림은 정부 청사 내에 있는 성 베르나르도 예배당 제단에 걸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의 최초 계약 기록(1478년 1월 10일)은 최초의 계약 불이행 기록이 되고 말았다. 이유가 무엇이었지는 알 길이 없으나, 레오나르도는 25피오리노라는 착수금을 받고도 이 일을 완성하지 않았다. 그 후 레오나르도는 몇 차례에 걸쳐 이 제단화 제작을 중도 포기했으며, 결국 필리피노 리피가 마무리해서 완성했다.

    동방박사의 경배
    <동방박사의 경배>는 산 도나토 아 스코페토 수도원에서 의뢰했다. 아무래도 이 계약 이면에는 이 수도원의 경제 고문이었던 아버지 세르 피에로의 입김이 작용했던 모양이다.

    레오나르도는 와인과 밀가루를 미리 받아야 할 만큼 쪼들렸지만 정작 재료비는 자비로 부담하며 이 대작의 밑그림을 그렸다.

    여행길에 오르다
    1481년, 레오나르도가 <동방박사의 경배>를 제작하던 무렵, 베로키오 공방의 동문인 보티첼리와 페루지노, 기를란다요와 시뇨렐리, 코시모 로셀리 등 피렌체를 대표하는 화가들이 로마의 시스티나 예배당 내부 벽화 제작을 위해 여행길에 올랐다. 무척이나 명예로운 일이었다. 피렌체를 대표하는 이 정예 화가 명단에 선정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아마도 레오나르도의 마음에 먹구름을 드리웠을 것이다. 또 그 무렵 스승 베로키오도 <콜레오니 기마상> 제작을 위해 베네치아로 떠날 준비를 했다.

    레오나르도는 불리한 조건의 계약을 맺고 또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 제단화를 앞에 두고,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버티고 있었다. 신천지를 찾아 드디어 고향을 등져야 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목적지는 롬바르디아 지방의 중심 국가 밀라노였다. 레오나르도가 고향을 떠남으로써 <동방박사의 경배>는 끝내 미완성으로 남았고(오늘날까지 미완성 상태로 전해짐), 수도원은 결국 필리피노 리피에게 새로운 <동방박사의 경배>를 다시 의뢰해야 했다.

    장년 레오나르도
    마침내 대작 완성! 〈최후의 만찬〉
    좀처럼 대작을 완성하지 못하던 레오나르도는 드디어 대표작으로 내세울 만한 작품을 그려냈다. 바로 그 유명한 <최후의 만찬>이다.

    이 작품은 일 모로가 의뢰한 것으로, 그가 가문의 영묘로 점찍어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의 식당 벽에 그려졌다. 1495년 일 모로는 마침내 정식으로 밀라노 공 자리에 올랐고, 프랑스 전쟁이 본격화하기 전 마지막으로 영광의 시대를 누리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이 벽화에 기존의 프레스코 기법이 아닌, 템페라와 유화물감을 섞어서 개발한 독자적인 방법을 활용했다. 그런데 이 방법 때문에 곰팡이가 슬거나 물감이 벗겨지기도 해서 완성 직후부터 그림이 훼손되는 비극이 벌어졌다. 하지만 최근 대대적으로 보수한 덕분에 오염이나 역대 수도사들의 덧칠을 제거하고, 그려졌을 당시 모습에 상당히 가까운 수준으로 재현되었다.

    숙명의 경쟁자, 레오나르도 vs. 미켈란젤로
    1503년 봄, 레오나르도는 체사레 보르자의 보좌관 임무를 마치고 피렌체로 돌아왔다. 당시 로마에서 <피에타>를 완성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천재 신인 예술가 미켈란젤로도 피렌체로 돌아와 대리석 거상 <다비드>를 한창 제작하고 있었다.

    1503년부터 1505년은 피렌체가 낳은 이 두 거장이 함께 피렌체에 머물던 기적과 같은 2년이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태생과 성격, 사고방식 등 하나부터 열까지 정반대였고,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는 앙숙 사이로 유명했다.

    레오나르도는 조각 작업을 "먼지투성이에다 땀을 흘려 쉰내가 나고, 얼굴은 끈적끈적, 온몸은 대리석 가루로 뒤덮이는 제빵사나 다름없는 일", "조각 따위 오래가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값어치도 없는 노동"이라고 말했다. 이에 질세라 미켈란젤로도 "유화 따위는 여자애들에게나 어울리는 예술"이라며 서로 자신의 예술이 낫다고 주장했다.

    마침내 라파엘로도 등장! 3대 거장, 피렌체에 집결
    이탈리아 중부의 우르비노에서 태어난 라파엘로는 페루지노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했는데, 일찍이 두각을 나타내 17세에 작품을 주문 받는 등 이미 어엿한 화가로 활동했다. 타고난 노력가로 배움을 멈추지 않았던 그는 최고의 예술가들이 피렌체에서 경쟁하며 실력을 갈고닦는다는 소문을 듣고는 혼자 뒤처지지 않을까 안달하다가 그동안 쌓은 경력을 버리고 피렌체로 왔다.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에게는 '구성'의 중요성을, 미켈란젤로에게는 '뼈와 근육으로 이루어진 육체의 움직임'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라는 유례없는 천재들에게서 좋은 부분만 융합해 한 단계 승화시킨 라파엘로의 화풍은 후세 화가들에게 오래도록 본보기로 여겨졌다.

    만년 레오나르도
    1515년경 휘몰아친 폭풍, 대홍수 밑그림을 수없이 남기다
    이제 대작 유화 같은 대형 프로젝트에는 더 이상 손대지 않던 레오나르도였지만, 이 시기에 그는 ‘폭풍과 대홍수’를 주제로 한 그림을 다수 남겼다. 세상의 종말을 방불케 하는 그 압도적인 풍경들은 거대한 해일에 삼켜지는 세계를 눈앞에 펼쳐 보이는 듯하다. 오랜 세월 수력 연구에 천착해온 레오나르도는 물이 지닌 잠재적 위협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 압도적인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 그 경고를 그림으로 새긴 것인지도 모른다.

    축제 프로듀서 업무에 대한 의욕은 사그라지지 않고!
    이제 집필에서도 거의 손을 놓고 완전히 은거 생활에 접어든 듯한 레오나르도였지만, 알고 보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까지 축전과 제전 기획·연출에 열정적으로 관여했다.

    1517년 가을부터 이듬해 6월까지 약 반년 동안 대형 행사가 4개나 개최되었는데, 레오나르도가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 자세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천국의 제전>을 재현한 듯한 연회가 프랑스 왕을 위해 열렸다는 기록이 곤자가 가문(이사벨라 데스테의 시댁)으로 보낸 편지에 남아 있다.

    이 <천국의 제전> 재연은 1518년 6월 19일, 프랑스 왕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열린 행사였다. 레오나르도의 명성이 단숨에 퍼져나간 밀라노 축제로부터 28년이 지난 때다.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 집대성한 경험과 기술로 꿈결같이 환상적인 축제를 다시금 모두에게 선보였을 것이다.
    이 행사는 레오나르도가 마지막으로 맡은 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