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북쪽, 레누스강과 다누비우스강 너머에는 로마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있었다. 그곳 사람들은 도시의 대리석 광장이 아니라 숲과 늪, 강과 들판 사이에 흩어져 살았다. 화려한 신전보다 신성한 숲을 두려워했고, 법정의 긴 변론보다 창과 방패 앞에서 명예를 확인했다. 로마인은 그들을 ‘야만’이라 불렀다. 그러나 타키투스가 기록한 그 야만의 세계는 단순히 거칠고 미개한 곳이 아니었다. 이상하고 낯설지만, 묘하게 질서 있고 강인한 세계였다.
‘게르마니아’는 짧다. 그러나 그 안에는 유럽의 기원, 로마 제국의 불안, 공동체의 힘, 문명과 야만의 경계, 고전 오독의 위험까지 압축되어 있다. 이 책을 읽는 일은 2,000년 전 북방의 숲으로 들어가는 일이자, 우리가 고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일이기도 하다
■ 저자 타키투스
저자 타키투스는 로마 제국의 한복판에서 제국의 불안과 균열을 가장 먼저 읽어낸 역사가이다. 평민 기사 계급으로 태어나 수사학 교육을 받았고, 이후 원로원 의원과 법무관, 집정관, 아시아 속주 총독에 이르기까지 로마 권력의 중심을 차례로 통과했다. 회의가 열리는 원로원, 판결이 내려지는 법정, 제국 행정이 실제로 움직이는 현장까지 그는 국가가 운영되는 핵심 장면들을 내부자의 눈으로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바깥에서 짐작한 제국이 아니라, 안에서 직접 겪고 관찰한 로마의 실상이 담겨 있다.
■ 역자 박문재
역자 박문재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독일 보쿰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또한, 고전어 연구기관인 비블리카 아카데미아(Biblica Academia)에서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 원전들을 공부했다. 대학 시절에는 역사와 철학을 두루 공부했으며, 전문 번역가로 30년 이상 인문학과 신학 도서를 번역해왔다.
역서로는 ‘자유론’(존 스튜어트 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막스 베버), ‘실낙원’(존 밀턴) 등이 있고, 라틴어 원전을 번역한 책으로 ‘고백록’(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의 위안’(보에티우스), ‘유토피아’(토머스 모어), ‘우신예찬’(에라스무스) 등이 있다. 그리스어 원전에서 옮긴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과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향연’,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이솝 우화 전집’ 등은 매끄러운 번역으로 독자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 차례
지도와 그림으로 미리 읽는 ‘게르마니아’
제1부 야만이라 불린 문명 - 게르마니족의 기원과 사회적 관습
1장 게르마니아의 지리적 경계 / 2장 게르마니족의 기원과 이름
3장 헤르쿨레스와 울릭세스에 관한 전설 / 4장 게르마니족의 혈통과 외모
5장 게르마니아의 지형적 특성과 자원 / 6장 게르마니족의 무기와 전술
7장 신분 체계와 가족 제도 / 8장 여성의 사회적 지위 / 9장 종교 의식
10장 점술법 / 11장 각종 공무 처리법 / 12장 형벌 제도
13장 청년의 성장과 무기 소지 / 14장 수행원 제도
15장 평시 생활상과 선물 / 16장 마을과 주거 형태 / 17장 의복과 장신구
18장 결혼 제도 / 19장 간통죄 처벌법 / 20장 자녀 양육과 상속법
21장 우호 관계의 대물림과 손님 환대 / 22장 하루 일과와 연회
23장 식사와 음주 습관 / 24장 오락과 즐길거리 / 25장 노예와 해방 노예
26장 고리대금업과 토지 분배 / 27장 장례 절차와 문화
제2부 칼로도 지우지 못한 이름들 - 주요 게르마니 부족의 지리와 개별적 특징
28장 게르마니족과 갈리족 / 29장 바타비족과 마티아키족
30장 카티족의 영토와 특성 / 31장 카티족의 특이한 관습
32장 우시피족과 텐크테리족 / 33장 브룩테리족 / 34장 더 북쪽에 사는 부족들
35장 카우키족 / 36장 케루스키족 / 37장 킴브리족 / 38장 수에비족
39장 셈노네스족 / 40장 랑고바르디족과 그 밖의 다른 부족들
41장 헤르문두리족 / 42장 마르코마니족과 콰디족 / 43장 동쪽의 수에비족들
44장 수이오네스족 / 45장 아이스티이족 / 46장 동쪽 경계 밖의 부족들
해설 / 박문재
타키투스 연보
도시의 대리석 광장이 아닌 숲과 들판 사이에서 낯설지 않지만 질서 있는 게르마니족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독자들은 이천 년 전 북방의 숲으로 걸어가 유럽의 기원과 공동체의 힘을 깊이 있게 마주하게 된다.
게르마니아: 유럽의 뿌리
야만이라 불린 문명 - 게르마니족의 기원과 사회적 관습
게르마니족의 기원과 이름
나는 게르마니족이 게르마니아 토착민이며 이민족의 침입이나 교류로 뒤섞이는 일은 없었다고 믿는다. 고대에 이주는 대개 육로보다 바닷길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게르마니아를 둘러싼 그 광활하고 험난한 바다까지 우리 세계의 배가 일부러 접근했을 리는 거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알려지지 않은 험한 바다의 위험은 제쳐두더라도 누가 아시아나 아프리카 혹은 이탈리아를 떠나 게르마니아로 오려 했겠는가? 땅은 척박하고 기후는 거칠며, 살기에도 좋지 않고 눈으로 보기에도 음울한 곳인데 말이다.
게르마니인들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오래된 노래로 대지에서 태어난 투이스토 신을 찬양한다. 그들에게 이 노래는 기억과 연대기를 보존하는 거의 유일한 방식이다. 그들은 투이스토의 아들 만누스를 민족의 시조로, 만누스의 세 아들을 부족의 창시자로 여긴다. 이 세 아들의 이름을 따라 대양에 가까이 사는 자들은 잉가이보네스족, 중앙에 사는 자들은 헤르미노네스족, 나머지는 이스타이보네스족이라 부른다. 먼 옛일에 대해서는 누구나 마음껏 추측할 수 있는 법이어서, 어떤 이들은 신으로부터 더 많은 자손이 태어났고 부족도 더 많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마르시족, 감브리비이족, 수에비족, 반딜리이족을 예시로 들며 진정한 옛 부족의 이름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게르마니아라는 이름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며 비교적 근래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레누스강을 건너 갈리족을 몰아낸 퉁그리족은 스스로를 게르마니 또는 게르마니족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원래는 특정 부족의 이름이었을 뿐 민족 전체의 이름은 아니었던 것이 점차 널리 퍼졌다. 처음에는 승리한 부족이 적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기 위해 이 이름을 붙였고, 그 이름이 정착된 뒤에는 모든 부족이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게르마니족의 혈통과 외모
나는 게르마니아 주민들이 다른 민족과의 혼인으로 피가 섞이는 일 없이, 순수한 단일 민족으로 존재해왔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따라서 그들은 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비슷한 외모를 지니고 있다. 매섭게 노려보는 듯한 푸른 눈, 붉은 머리카락, 거대한 체구 그리고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강한 힘이 그 특징이다.
하지만 그들은 강인한 신체에 비해 힘들고 지속적인 일을 이겨내는 참을성이 부족하고, 갈증과 더위도 잘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기후나 토양 덕분에 추위와 굶주림에는 익숙하다.
게르마니족의 무기와 전술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들을 보면 게르마니아에는 철이 풍부하지 않은 듯하다. 그들 중 소수만이 검이나 장창을 사용한다. 대부분은 그들 말로 프라메아라고 하는 창을 사용한다. 프라메아는 무쇠로 된 창끝이 좁고 짧지만, 날카롭고 다루기 쉬운 무기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근접전을 벌일 수도, 원거리 교전을 치를 수도 있다. 기병에게는 프라메아 창과 방패만으로도 충분한 무기가 된다. 그러나 보병들은 던질 수 있는 투창을 지닌다. 그들은 투창 여러 자루를 챙겨 다니며, 몸을 가리지 않거나 얇은 망토만 걸친 상태에서 아주 먼 거리까지 투창을 던질 수 있다.
그들은 갑옷을 화려하게 장식하지 않지만 방패에 사용하는 색상은 아주 신중히 고른다. 흉갑을 갖춘 이는 거의 없고, 여기저기서 한두 명 정도 금속이나 가죽으로 만든 투구나 머리 보호구를 쓰고 있을 뿐이다. 게르마니족의 말은 평범한 외형을 지녔으며 달리는 속도도 특출나지 않다. 우리는 관례에 따라 말을 세심하게 훈련시켜 원을 그리며 방향 바꾸는 법을 가르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단지 직선으로 또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달리며 대열에 뒤처지지 않는 법만 가르칠 뿐이다.
전체적으로 그들은 보병의 수가 가장 많다. 따라서 전투 대열은 보병과 기병이 섞여 구성된다. 젊은이들 중 달리기가 날렵한 이들이 선발되어 기병과 함께 움직이며 협공한다. 이 보병들은 최전방에 배치된다. 그 수는 정해져 있으며, 각 부락에서 백 명씩 선발되므로 백인대라고 불린다. 백인대는 처음에는 단순히 숫자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명예로운 칭호가 되었다. 백인대는 쐐기 모양 전열을 갖추며, 설령 후퇴하더라도 다시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면 두려움의 표시가 아닌 훌륭한 전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몹시 치열한 전투에서도 끝까지 전우의 시신을 수습한다. 그들 사이에서 방패를 버리는 것은 가장 큰 치욕이며, 불명예를 행한 자는 종교 의식이나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다. 그래서 전쟁터에서 살아남고도 그 수치를 견디지 못한 이들은 스스로 목에 올가미를 걸어 불명예를 끝내기도 한다.
신분 체계와 가족 제도
게르마니인들은 귀족 가운데서 왕을 선출하고 용맹함을 기준으로 장군을 선출한다. 왕이라 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지는 못한다. 또한 장군의 권위는 명령보다는 앞장서 싸우는 모범적 태도와 그로 인한 존경심에서 나온다. 그들은 넘치는 기백으로 전열의 최전방에서 돌격함으로써 권위를 행사한다. 벌을 내리고, 사람을 가두고, 매질하는 권한은 오직 사제에게만 있었다. 이는 개인의 원한을 갚기 위한 처벌도, 장군의 명령에 따른 징계도 아니었다. 게르마니인들은 그것을 오직 신의 뜻에 따른 행위로 여겼다. 게르마니인들은 신이 늘 전투에 임하는 자들과 함께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신성한 숲에서 가져온 형상이나 표식을 지니고 전투에 나간다. 그들이 이루는 쐐기 형태 진은 가족이나 친족 관계에 따라 짜이며, 이는 용기를 북돋우는 큰 원동력이 된다. 전투가 벌어지는 곳 근처에 목숨보다 소중한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여인들의 울부짖는 소리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가족은 전사들에게 가장 신성한 증인이고, 가족의 격려는 그 어떤 찬사보다 강하다. 전사들은 부상을 당하면 어머니와 부인에게 상처를 보여준다. 여인들은 상처의 수를 세고 살펴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전사들에게 음식을 주고 끝없는 격려를 건네 사기를 북돋운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미 전세가 기울어진 전투가 여인들 덕분에 뒤집힌 적이 여러 번이었다고 한다. 여인들이 끝까지 맞서 싸우라 간청하며 가슴을 내밀고 자신이 포로가 되게 내버려둘 것이냐고 호소하자, 전사들이 힘을 내 전열을 다듬고 전세를 역전시킨 것이다. 게르마니인들은 자기가 사로잡히는 것보다 부족 여인들이 포로가 되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따라서 어느 게르마니 부족의 여성들을 인질로 잡으면, 그 부족을 더욱 확실하게 압박하고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게르마니인들은 여인에게 신성한 예지력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여인들의 조언을 무시하거나 그들이 받은 신탁이나 예언을 결코 가볍게 넘기지 않는다. 우리는 신으로 추존된 베스파시아누스 치세기에 게르마니인들이 벨레다라는 여인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을 보았다. 옛날에 게르마니인들은 아우리니아를 비롯해 여러 여인을 숭배했다. 이는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지 아부하기 위한 것도, 그 여인들을 신격화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점술법
게르마니인들은 전조와 점괘를 몹시 중시한다. 그들이 점을 치는 법은 단순하다. 과실수에서 가지를 잘라내 작은 조각으로 자르고, 각각의 조각에 서로 다른 표시를 남긴 후 흰 천 위에 아무렇게나 던지는 것이다. 공적인 일을 점칠 때는 부족의 사제가, 사적인 일을 점칠 때는 집안의 가장이 신께 기도를 올리고 하늘을 보며 한 번에 하나의 조각을, 세 번 집어든다. 그 조각들에 미리 새겨둔 표시에 따라 점괘를 해석한다. 만약 금지 표시가 새겨진 조각이 나오면 그날은 같은 일에 관해 더 이상 점치지 않는다. 반면 허락의 표시가 새겨진 조각이 나오면 전조를 통해 다가올 운명을 확인한다.
게르마니아에서도 새들의 울음소리와 나는 모양으로 점 치는 법이 사용된다. 그러나 이 민족만의 고유한 특징은 말의 예언과 경고를 살핀다는 것이다. 점괘에 사용되는 흰 말은 앞서 말한 신성한 숲과 원림에서 공공으로 사육하고 관리하며, 농사나 운반 등 고된 노동은 전혀 시키지 않는다. 점을 치기 위해서는 신성한 흰 말을 마차에 묶고, 왕과 사제 또는 부족장이 함께 동행해 그 울음소리와 콧김을 주의 깊게 살핀다. 이는 가장 신실한 점괘이자 전조다. 평민뿐만 아니라 귀족과 사제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스스로를 신의 종으로, 말은 신의 뜻을 전하는 전령 같은 존재로 생각한다.
게르마니족에게는 중대한 전쟁의 결과를 점치는 또 다른 방법도 있는데, 전쟁 중인 적군의 포로를 붙잡아 부족에서 선발된 자와 싸우게 하는 것이다. 이들은 각자 자기 부족의 무기로 맞붙어 싸우며, 그 결과로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하는지 미리 판단하고 받아들인다.
수행원 제도
전쟁에서 지도자는 용맹하게 전투를 치르지 못한 것을, 수행단은 지도자만큼 용맹하게 맞서 싸우지 못한 것을 수치로 여긴다. 특히 수행원이 전투에서 물러서거나 달아나 지도자보다 오래 살아남는 것은 평생 불명예이자 치욕으로 남는다. 지도자를 방어하고 보호하며, 자신의 공적으로 인한 영광도 그에게 돌리는 것이 수행원의 맹세이자 역할이다. 지도자들은 승리를 위해, 수행원들은 지도자를 위해 싸운다.
자신의 출신 부족이 긴 평화로 전투력을 잃고 무기력해지면 귀족 청년들은 전쟁을 수행 중인 부족을 자발적으로 찾아간다. 게르마니인들에게 평화는 결코 미덕이 아니다. 그들은 격렬한 전투를 통해서만 더 큰 명성을 얻을 수 있으며, 특히 거대 규모의 수행단은 오직 힘과 전쟁을 통해서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행원들이 받는 대가는 거창하지 않다. 급료라 해봐야 소박한 연회에서 음식을 대접받는 정도다. 때때로 그들은 지도자에게 용맹한 군마와 피 묻은 승리의 창을 내려달라고 청한다. 이렇게 지도자가 수행원에게 베푸는 재원 역시 전쟁과 약탈을 통해 마련된다. 그들에게는 땅을 갈고 한 해를 기다리면 수확을 얻을 수 있다고 약속하는 것보다 힘겹게 싸우고 부상을 입더라도 전쟁을 치르자고 설득하는 것이 더 쉽다. 게르마니인들은 피로 순식간에 얻을 수 있는 것을 땀 흘려 천천히 얻는 것을 게으르고 무능한 짓으로 여긴다.
마을과 주거 형태
게르마니 부족들이 도시를 이루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서로 가까이 사는 것조차 받아들이거나 견디지 못하는 듯하다. 샘터나 들판, 숲처럼 각자 원하는 곳에 흩어져 거주할 뿐이다. 또한 그들은 우리처럼 주택을 서로 나란히 세워 마을을 구성하지 않으며, 집 주변에 충분히 공간을 둔다. 그런 방식이 화재의 위험에 대비한 것인지 아니면 건축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인지는 모른다.
그들은 석재나 기와도 사용하지 않는다. 전혀 가공되지 않은 목재로 집을 짓고, 미관이나 장식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다만 특정 장소들에는 순수하고 빛나는 흙을 정성스럽게 발라 마치 그림을 그리거나 색을 입힌 것 같은 효과를 준다.
또한 그들은 땅속에 굴을 파고, 그 위에 많은 거름을 쌓아둔다. 이 지하 공간은 겨울 동안 피난처이자 농작물 저장고로 사용된다. 동굴을 만드는 이유는 혹독한 추위에 대비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적을 속여 식량을 숨기고 보호하기 위해서다. 적들이 쳐들어오면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약탈하지만 그렇게 숨긴 것은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칼로도 지우지 못한 이름들 - 주요 게르마니 부족의 지리와 개별적 특징
게르마니족과 갈리족
로마 최고의 저술가이자 신으로 추존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족이 과거에는 훨씬 더 강력했다고 전한다. 그러한 점에서 갈리족이 게르마니아로 이주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있다. 강성해진 부족이 주변 왕국들에 의해 아직 갈라지지 않고, 공동의 정착지를 함께 차지하고 있던 시절이었다면, 강 같은 자연 경계는 이동을 막기에는 너무 약하고 우스운 장애물에 불과했을 것이다.
따라서 헤르키니아숲과 레누스강, 모에누스강 사이 지역은 헬베티이족이 차지했고, 더 먼 지역은 보이이족이 차지했다. 이 둘은 모두 갈리아 계통 부족들이다. 비록 주민은 바뀌었으나 보이하이뭄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남아 그 땅의 오래된 기억을 전해준다.
한편 게르마니인인 오시족이 판노니아로 이주해 아라비스키족이 되었는지, 혹은 아라비스키족이 게르마니아로 이주해 오시족이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두 부족은 지금도 같은 언어와 제도, 관습을 유지하고 있다. 과거 양쪽 강변이 비슷하게 가난하고 주인 없는 땅이었으므로 이쪽이나 저쪽이나 그들을 끌어들이기에 비슷하게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트레베리족과 네르비이족은 과도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자신들이 게르마니인에게서 기원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러한 혈통의 명예를 내세워 갈리족과의 유사성, 더 나아가 갈리족의 나태한 성질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레누스강 연안에는 의심할 여지 없이 게르마니 부족들이 거주한다. 방기오네스족, 트리보키족, 네메테스족이 그들이다. 우비이족은 로마 식민지가 되는 영예를 얻었고, 자신들의 거주지를 건설한 이의 이름을 따, 아그리피넨세스라고 불리는 것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자신들의 기원이 게르마니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래전에 레누스강을 건너왔고, 충성심을 인정받아 그 강 연안에 배치되어 정착했다. 이는 감시가 아니라 다른 민족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타비족과 마티아키족
이 모든 부족 가운데 두드러지게 용맹한 것은 바타비족이다. 그들은 강변에서 멀지 않은 레누스강의 한 섬을 차지하고 산다. 본래 카티족의 일부였으나 내분으로 인해 지금의 거주지로 이동해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그들의 명예와 옛 동맹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들은 조공을 바치는 굴욕을 겪지도, 세금 징수관에게 시달리지도 않는다. 세금과 공물에서 면제되어 오직 전투를 위해 따로 존재하는, 마치 병장기와 갑옷 등 전쟁 무기 같은 존재다.
마티아키족 역시 바타비족과 마찬가지로 로마에 복종한다. 로마의 위세가 레누스강과 제국의 옛 경계 너머까지 경외심을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게르마니아 인근 강변에 영토를 두고 있지만 마음과 정신만은 로마인과 같다. 그 밖의 점에서는 바타비족과 비슷하나 그들이 살아가는 토양과 기후의 영향으로 한층 더 활력이 있다.
한편 레누스강과 다누비우스강 너머에 정착했다고 해서, 데쿠마테스 농지를 경작하는 사람들까지 게르마니족에 포함시키고 싶지는 않다. 가장 경박한 갈리인과 빈곤 속에서 대담해진 자들이 그 땅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유권이 불확실한 땅을 점유했다. 그러나 이후 경계가 설정되고 수비대가 전진 배치되면서 그 지역은 제국 안으로 들어온 만이자 속주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카티족의 영토와 특성
이 부족들 너머에서 살아가는 카티족의 거주지는 헤르키니아숲에서 시작된다. 그들은 다른 게르마니 부족들과 달리 늪이 많은 평야가 아니라 구릉 지대에 터를 잡고 산다. 언덕은 이어지다가 점차 잦아들고, 헤르키니아숲 또한 그들의 영토를 따라 이어지다가 그 경계와 함께 끝난다.
카티족은 다른 부족들보다 더 강인한 신체와 단단한 사지, 위압적인 용모와 왕성한 정신력을 지닌다. 게르마니인들 가운데서도 특히 이성적 사고력과 수완이 뛰어나 지도자를 선출하고 그 명령에 복종하며 대오를 갖추어 행동한다. 그들은 기회를 포착하고 공격을 늦출 줄 안다. 낮에는 작전을 세우고, 밤에는 방어 시설을 구축한다. 또한 행운은 불확실하지만 용맹은 확실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와 같은 군사적 태도는 매우 드문 것으로, 로마군의 훈련을 받은 병사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들은 병사 개개인보다 장군의 지휘를 신뢰하며, 전력의 중심은 보병에 있다. 보병들은 무기뿐 아니라 철제 도구와 보급품까지 함께 운반한다.
다른 게르마니 부족들이 단순히 전투를 치르러 나선다면 카티족은 전쟁을 수행하러 나선다. 그들이 기습 공격을 하거나 충동적으로 전투를 벌이는 일은 드물다. 기병대의 특징은 신속하게 승리를 거두고 물러나는 것이다. 반면 보병대가 신속하게 움직인다면 이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행동이며, 시간을 끌며 신중하게 움직이는 태도야말로 오히려 견고함과 강인함의 증거다.
카티족의 특이한 관습
다른 게르마니아 부족들에서는 드물고 개인의 용기에 맡겨지던 관습이, 카티족에게는 공동의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그들은 성인이 되면 머리와 수염을 기르기 시작해서 적을 죽인 뒤에야 비로소 그 모습을 벗어던진다. 이는 용맹에 바친 서약의 얼굴이다. 그들은 피로 물든 전리품 위에서 이마를 드러내고는, 그제야 비로소 태어난 값을 치르고 부족과 부모에게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고 여긴다. 반대로 비겁하게 전투를 피한 자들은 지저분하고 덥수룩한 털을 끝내 벗어던지지 못한 채 그대로 지니고 살아간다.
가장 용감한 자들은 몸에 무쇠 고리를 차고 다니는데 이는 불명예와 수치를 상징한다. 무쇠 고리를 마치 족쇄처럼 차고 다니다가 적을 죽인 뒤에야 비로소 그 고리를 풀어던진다. 많은 카티족 전사들이 이러한 표식을 자랑스럽게 여겨, 머리가 희어질 때까지도 그 모습을 유지하며 아군과 적군 모두의 시선을 끈다. 전투가 시작되면 언제나 그들이 선두에 선다. 그들은 위협적인 모습으로 최전선에 서며, 평화로운 시기에도 그 표정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집도, 토지도, 일정한 생업도 없다. 어디에서든 타인의 도움으로 살아가며 자신의 것은 돌보지 않고 남의 것을 아낌없이 사용한다. 노년이 되어 기력이 쇠하고 강인함을 잃을 때까지 그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우시피족과 텐크테리족
카티족 인근에는 이미 뚜렷한 물길을 이루어 경계선 역할을 하는 레누스강을 따라 우시피족과 텐크테리족이 거주한다. 텐크테리족은 전투 능력으로 널리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특히 기마술에 탁월하다. 그들의 기병이 지닌 명성은 카티족 보병의 명성과 맞먹는다. 이러한 전통은 조상들이 확립한 것이며, 후손들이 그대로 이어받는다.
기마술은 아이들에게는 놀이, 젊은이들에게는 경쟁이 되며, 노년까지도 계속 이어진다. 그들에게 말은 가족과 집, 상속 재산과 함께 대물림된다. 그중 특히 말은 다른 재산과 달리 장남이 아니라 전쟁에서 가장 용맹하고 뛰어난 아들이 물려받는다.
브룩테리족
한때 텐크테리족 근방에 브룩테리족이 살았다. 지금은 카마비족과 앙그리바리이족이 그 자리에 이주해 정착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두 부족은 주변 부족들의 동의 아래 브룩테리족을 추방하고 끝내 몰살시켰다고 한다. 그것이 그들의 오만함에 대한 증오 때문이었는지, 약탈의 이익 때문이었는지 혹은 신들이 우리 로마인들에게 베푼 어떤 호의 덕분이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신들은 우리에게 전투의 구경거리까지 마련해주신 셈이다. 로마의 무기와 창이 동원되지 않았는데도 6만 명이 넘는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죽음이 마치 우리를 위한 즐거운 눈요깃거리처럼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부디 게르마니아의 부족들이 우리 로마에 우호적이지 않더라도 서로에 대한 증오만은 계속 간직하기를 바란다. 제국의 앞날이 위태로운 지금, 적들 사이의 불화보다 더 큰 선물을 운명이 우리에게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