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공부가 끝나면 아이 공부는 시작된다
 
지은이 : 서안정
출판사 : 한국경제신문
출판일 : 2019년 05월




  • 유아교육 전문 푸름이닷컴에서 17년간 육아 멘토로 활동하며 딸 아이 세 명을 영재로 키운 서안정 작가. 그녀는 푸름이닷컴 내 유명인사로 아이를 양육할 때 흔히 궁금한 질문부터, 아이의 학교생활 공부 방법까지 실질적이고 유용한 정보를 주고 또 바로 실천하고 적용해볼 수 있는 팁들을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교육 한번 시키지 않고, 그 흔한 학습지 한 번 시키지 않은 채 세 아이들을 영재로 키울 수 있었던 방법은 무엇일까? 그녀의 딸 아이 세 명은 특별한 준비 없이 영재원의 테스트를 통과했고, 국제고, 과학고 등에서 즐겁게 본인의 뜻대로 공부하고 있다. 


    엄마 공부가 끝나면 아이 공부는 시작된다


    믿는 순간 기적이 되는 격려

    아흔아홉 가지보다 한 가지를 칭찬하라

    칭찬은 아이가 자신의 능력을 믿게 하는 뿌리

    첫째 아이가 아직 어렸을 때 내가 읽었던 육아서 가운데 칼 비테의 자녀교육 이야기가 있었다. 당시 내 마음에 강한 울림을 주었던 책이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에피소드 하나는 저자가 영특하게 성장하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보면서 주변 사람들이 칭찬을 하기 시작한 부분이다. 그런 상황에 자주 노출된 저자는 아들이 자신의 우수함을 깨닫고 안하무인하게 자라날 것이 염려되어 부모인 자신이라도 아이의 기특한 부분을 칭찬하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나 역시 아주 큰 공감을 했다. 다른 사람을 우습게보며 자신이 잘났다고 거들먹거리는 인성이 나쁜 사람을 아주 경멸했기 때문에 유독 그 부분에 꽂히게 되었다. 그렇게 나 역시 아이의 영특한 면을 칭찬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고, 나는 이 결심을 아주 충실히 지켜냈다. 특히 아이가 학교생활을 하며 본격적으로 상을 받아오기 시작하면서부터 더 그랬다.


    하지만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뒤 소중한 내 아이는 그때 나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큰 상처를 입었다. 엄마의 칭찬을 듣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키우지 못하고 때로는 자화자찬, 때로는 자괴감에 사로잡혀 부초처럼 흔들렸다. 칭찬 없이 자랐던, 그럼에도 엄마의 사랑을 간절히 원했던 첫째 아이는 어떻게 하면 엄마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멋진 사람이 되면 되겠다’, ‘더 뛰어난 사람이 되면 되겠다’ 다짐하고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수업시간에 필요한 단순한 선긋기나 가위질조차 엄청 꼼꼼하게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학교 공부도 열심히 하여 전교 1등을 했고, 학교에서 열리는 대회에서는 그것이 무엇이든 수학, 논술, 영어, 과학, 한자 포스터 등 모든 대회에 참여하여 빠짐없이 상을 받아왔다. 그런데도 나는 그 많은 상을 받아오는 동안 아이에게 칭찬을 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고 그렇게 멋진 성취를 이뤄나가는데도 칭찬을 해주지 않는 엄마를 보면서 아이는 ‘더 뛰어나야겠구나’ ‘더 멋진 사람이 되어야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모든 성취를 이루고 나서도 칭찬을 받지 못하자 ‘그렇다면 공부를 전혀 하지 않고도 전교 1등을 해보면 어떨까, 그건 정말 놀라운 일이니 그렇게 해보자’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부를 하지 않고도 전교 1등을 한 아이에게 돌아온 것은 엄마의 더 큰 걱정이었고, 그렇게도 아이가 바라던 칭찬은 결국 들을 수 없었다.


    엄마의 칭찬은 아이가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는 뿌리라는 것을 첫째 아이를 통해 배웠다. 아무리 주변에서 칭찬을 받아도 내가 정말 그런 칭찬을 받을 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확신은 부모로부터 나온다.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아이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아픈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웠다.


    추후에 나는 부모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아본 적 없던 내가 나조차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아이에게까지 그러한 아픔을 물려주었다는 사실을, 나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내가 하필 칼 비테의 ‘칭찬하지 않기’에 꽂혔던 이유가, 인간성이 나쁜 사람을 경멸했던 이유가 내 안의 상처 입은 또 다른 자아인 ‘내면 아이’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따듯하게 지켜보는 적극적인 관망

    엄마의 조급함이 아이를 망친다

    시험 기간에 아이를 돕는 방법

    요즘은 초등학생만 되어도 아이들의 시험 기간에 엄마들이 약속을 잡지 않고 아이에게 몸과 마음을 집중한다고 들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서포트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 역시 아이들의 시험 기간이 되면 평소와 다르게 챙겨주는 부분이 있다. 바로 “엄마, 채점해줘”라고 요청할 때 나만의 문제집 채점이 시작되는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공부보다는 놀기에 열을 올리던 아이들이 어느 순간부터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조금씩 학습이라는 것을 하면서 문제집을 풀기 시작했다. 공부는 늘 스스로 하는 거라고 말해왔기에 공부의 시작과 끝 모두를 아이 혼자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채점까지 아이의 몫으로 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놀기만 하던 아이가 드디어 공부를 좀 해보겠다고 책상에 앉아 있는데 채점까지 아이에게 맡기면 노는 시간도 부족하고, 해야 할 일에 치여서 공부의 재미까지 반감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험 기간이 되면 빨간색 색연필과 볼펜 한 자루를 들고 채점을 하기 시작했다. 답지를 맞추다 보니 아이들이 어느 단원을 상대적으로 어려워하는지도 파악이 되고, 한마디씩 조언을 건네기에도 참 좋았다.


    내가 채점하는 방식은 빨간색 색연필로 아이가 맞힌 문제는 커다랗게 동그라미를 쳐서 아이의 성취감을 높여주고, 틀린 문제는 조그맣게 체크 표시를 해서 상대적으로 작고, 적게 느껴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 틀린 문제가 있는 페이지는 일일이 한쪽 귀퉁이를 접어 나중에 아이들이 접힌 부분만 펼쳐서 틀렸던 문제들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해두었다.


    서술형 평가가 중요해지면서 높은 배점을 차지하는 서술형 문제들이 등장하는데 한 문제당 점수가 너무 높다 보니 서술 내용에 따라 부분 점수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래서 문제집을 채점하면서 틀리지는 않았지만 아이가 써둔 서술형 답안이 조금 부족하거나 또 다른 표현이 있을 경우 플러스 기호를 쓰고, 답안지에 나와 있는 정답을 빨간색 볼펜으로 더 첨가해서 써둔 뒤 그 페이지 역시 한쪽 귀퉁이를 접어두었다. 한 번 더 읽고 넘어가라는 의미였다.


    초등학교까지의 공부는 당장 눈앞의 결과보다 학습에 대한 좋은 이미지와 향후 하게 될 학습에 대한 기본 실력을 키워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더 정확하게 서술해보라고 아이를 닦달할 필요도 없고, 완벽하게 쓰라고 몰아세울 필요도 없으며, 완벽하게 하지 않는 태도가 습관으로 굳어질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다. 또한 공부할 생각이 없는 아이에게 억지로 공부하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고등학교까지 아이를 키워보니 아이는 적절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적당한 거리에서 지켜보며 아이가 원할 때 언제든지 아이의 욕구에 반응해주면 자신만의 속도로 부모의 상상을 넘어서며 멋지게 성장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경험에 의하면 갈등은 늘 그 엇박자를 그릴 때 발생했다. 부모는 시키고자 하는데 아이가 하지 않을 경우나 아이는 하고자 하는데 부모가 관심이 없는 경우에 말이다.



    절제를 위한 담대한 허용

    스마트폰과 게임에 대처하는 자세

    스마트폰, 허용 기준은 엄마의 선택

    교육이나 정신의학 분야의 많은 전문가들은 만 12세 이하의 아이들이 스마트폰에 중독되면 기억력, 집중력, 사고력 등의 뇌 성장 발달에 방해가 되고, 수면장애로 인한 체력 저하, 거북목 증후군뿐만 아니라 우울과 강박이란 불안한 정서가 동반될 확률이 높다고 한다. 또한 현실에 대한 부적응과 자극적인 매체를 통한 폭력성 증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미국 텍사스의 오스턴대학교에서 실험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스마트폰을 단지 옆에 놓아두는 것만으로도 인지능력이 눈에 띄게 떨어진다는 보고도 있다.


    이런 이유로 많은 부모들이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늦게 사주고 싶어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또 그렇지가 않다. 초등학교만 들어가도 이미 많은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고, 학교 과제나 준비물 등의 정보들이 반 톡방을 통해 공유되거나 팀별 수행평가를 위해 수시로 의견을 나눠야 하는 등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생기기 때문이다.


    나 역시 첫째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처음 사준 후로 1년 동안 크고 작은 마찰을 빚었다. 그때마다 규제도 해보고, 화도 내어 보고, 설득도 해보고, 이야기도 나누어 보니 어느 순간 서로의 욕구지점과 불안 요소들이 보였다. 내 경우, 아이가 스마트폰 사용을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쌓아온 좋은 습관들을 모두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있었고, 아이 역시 친구들이 다 하는 카카오톡이나 SNS를 안 하다가 친구들을 잃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고민과 걱정들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서로가 염려하는 지점을 알게 되고 보다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하게 되면서, 나는 아이를 믿고 지켜볼 수 있게 되었고, 아이는 스스로 사용 시간을 조절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아이의 스마트폰 사용을 무조건 하지 말라고 강권하기보다는 아이가 왜 스마트폰에 빠져드는지 그 원인을 알고 대처해야 한다.


    결국 아이에게 언제, 얼마만큼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할 것인가의 문제는 엄마가 그런 아이를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컴퓨터게임이 문제아처럼 사회에 등장했을 때 많은 교육자와 전문가들이 부정적인 목소리를 냈지만 게임은 이제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 되어 미래의 유망한 분야가 되었다. 방송에서도 많은 연예인들이 여가 시간에 게임을 하며 쉰다는 얘기를 스스럼없이 고백하기도 한다. 게임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뜻이다.


    스마트폰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아이를 얼마만큼 지켜볼 수 있는가? 아무리 좋은 것도 내 몸에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러니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아이의 스마트폰 사용에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 말이다.



    당당하게 혼자 서는 독립

    사춘기를 무난하게 극복하는 지혜

    엄마의 내면 아이와 아이의 성장욕구가 충돌하는 시기

    내 경험에 의하면 사춘기는 아이가 부모로부터 독립하려는 두 번째 시기다. 2~3살 때 아이는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어떤 날은 손을 잡으랬다가 또 어떤 날은 잡은 손을 놓으랬다가 말할 수 없이 변덕을 부리며 육체적인 독립을 시도한다. 그리고 사춘기가 되면 정신적인 독립을 이루려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이전보다 더한 변덕의 과정을 보여주며 부모의 어떤 기대도 거절하면서 순도 100퍼센트로 자신을 응원해달라고 몸부림친다.


    한 인간이 올곧이 독립적인 존재로 성장하는 과정에는 부정의 시기가 필요하다. 제자가 스승을 뛰어넘어 자기만의 세계관을 세우기 위해 어느 한순간 스승의 가르침을 부정해야 하는 때가 오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아이는 자신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 그동안 부모가 주었던 삶의 방식과 가르침을 전면 부정하여 묵을 때를 털어내듯 부모를 뒤흔든다. 그 팽팽한 긴장감으로 서로 싸울 수밖에 없는 시점이 바로 아이의 사춘기인 것이다.


    또한 이 시기는 자라고 있는 ‘내 아이의 성장욕구’와 ‘부모의 내면 아이’가 충돌하는 시기다. 아이가 어릴 땐 부모의 심리를 건드리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는 아이에게 기대를 하게 되고, 그렇게 아이의 욕구와 부모의 욕구가 부딪혀 마찰을 빚다보면 서로 싸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부모의 그 욕구 안에는 과거 상처받은 내면 아이의 욕구 또한 깊이 들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자녀의 사춘기를 거치면서 부모는 이전과 다른 방식의 육아를 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아이를 더 잘 키울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인 나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내 삶에 집중해야 한다. 대기만성형 아이를 키우면서 ‘왜 너는 일찍부터 떡잎을 보여주지 않느냐’고 아이를 몰아붙이는 대신 왜 나는 아이를 기다리지 못하는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뚜렷한 떡잎형 아이를 키우면서 지금은 잘 자라고 있지만 일찍 핀 꽃이 빨리 시들면 어떻게 하느냐고 불안해하는 대신 왜 나는 아이를 믿지 못하고 초조해하는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 아이가 왜 이럴까?’ ‘대체 뭐가 문제야?’ ‘그까짓 게 뭐가 힘들어?’라는 시선이 아니라 “그래, 너 힘들었겠다” “네 말이 맞는 것 같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 현재 아이의 모습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엄마가 자신만의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며 그 틀은 대부분 자신의 결핍으로 인해 일어나는 증상이기 때문이다.


    비단 사춘기 아이뿐만이 아니다. 아이의 사회생활(유치원이나 학교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엄마는 이전과 다른 육아를 시작해야 한다. 아이와 함께하는 일상에서 마찰이 일어나는 거의 대부분의 지점에 내 자신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유치원에서 아이가 맞고 돌아온 것도 아닌데 걱정과 흥분에 휩싸여 “이제부터 너도 때려”라고 과잉 반응을 한다면 다른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아이가 학교에서 울며 돌아와 “짝꿍이 내 물건을 빼앗아 갔어”라고 얘기한다면 “짝꿍이 우리 OO와 장난을 치고 싶었을까?”라며 아이의 감정을 축소, 회피, 왜곡하지 말고 아이의 감정에 공감한 뒤 아이의 마음을 축소하고 싶은 내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친구가 없다고 우는 아이 옆에 앉아 그것을 엄마의 문제로 가져오지 말고 아이가 충분히 울고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격려하며 함께 걸어가야 한다.


    부모가 단단하면 아이는 바깥세상에 크게 휘둘리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엄마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엄마 자신을 찾아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그 에너지가 소중한 내 아이에게도 닿아 결국은 나와 아이 모두가 성장하게 된다.



    막연하지만 언젠가 확실히 다가올 꿈

    뒤에서 바라보고 선택을 믿어줘라

    나는 왜 아이의 꿈이 불안할까

    깨달음은 늘 한 번의 자각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세 아이를 키우며 수없이 경험했다. 어리석은 나는 비슷한 실수를 계속해서 반복했고, 또 반복하고 나서야 하나의 깨달음을 가슴에 새길 수 있었다. 가슴에 새기기 전까지는 일상에서 매번 그 어리석음을 되풀이했다.


    세 아이의 어린 시절, 우리 집엔 식탁 대화라는 문화가 있었다. 밥을 먹으면서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기에는 가끔씩 신문에 기사화된 내용을 읽어주었는데 주로 아이들이 자라서 맞이하게 될 미래사회에 대한 이야기였다. 미래에는 한 사람에게 여러 가지 직업이 필요하고, 평생 학습이 중요하다는 얘기였는데 그런 얘기를 나누는 시간 속에서 어느새 아이들은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생이 되었다.


    어느 날, 세 아이가 자신의 미래에 대해 꽤 불안해하고 자신 없어하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학교 성적도 좋고, 영재원에 다니며, 관심 분야도 다양하고, 각 분야에 있어 수준도 높은 아이들이 왜 이렇게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안해할까 고민하던 어느 날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가 식탁 대화에서 미래 사회의 변화와 이이들의 진로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그 메시지의 밑바탕에 나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함께 전달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앞으로의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다채롭고 빠르게 변화하니 얼마나 삶이 풍성하고 즐겁겠니?”라는 삶에 대한 희망과 설렘을 주지 않고,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데 좀 더 자유로운 어린 시절에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네 자신을 알아가고, 네게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며 실력을 키워야 하지 않겠니?”라며 불안 가득한 마음을 숨긴 채 허울 좋은 말들만 내뱉었다. 그저 말로만 직접 전달하지 않으면 되는 줄 알았다. 눈빛으로, 음성으로 이미 전달하고 있었음을 그때는 몰랐다.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불안과 걱정, 두려움을 아이들에게 전해주었다.


    아이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 그 뒷모습은 부모가 행동과 태도로 보여주는 삶의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부모가 그들 내면에 가지고 있는 다양한 감정들까지도 포함된다는 것을 아이를 키우면 키울수록 뼈저리게 느낀다. 부모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아이에게 부모는 그렇게 거울이 된다.



    거울 속 진짜 나와 만나는 대면

    피하지 말고 상처와 만나라

    우리는 모두 흔들리며 피는 꽃

    세 아이를 키운 시간들은 질곡의 여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느낀 적이 있다. 그래서 지난 5년간 내 마음에 대한 공부를 했다.


    나를 돌아보는 일은 참 멀고 어려운 시간이었다. 하필 그 시간들이 아이들의 사춘기와 부딪히면서 그 여정은 더욱 험난했다. 외면하고 살아온 나의 감정과 욕구를 표현하느라 아이들이 잘 보이지 않았던 적도 있었고, 수시로 아픈 몸으로 인해 마음까지 휘청거리기도 했으며, 어깨에 올려진 가정 경제의 무게 때문에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절망스럽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뒤죽박죽 섞여서 미칠 듯이 힘든 날도 있었고, 중간 중간 그 힘듦에 대한 보상을 받는 듯 날아오를 것 같은 날들도 있었다.


    그렇게 넘어지고 깨지고 다시 일어나 또 넘어지는 과정은 때때로 나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었고 좌절하게 했으며, 이대로 모든 것이 끝날까 봐 불안했던 날도 무척 많았다. 그런 날에는 괜히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듯 보이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남편 잘 만나 걱정 없이 애만 키우는 사람들이 부러웠고, 부모 잘 만나 일하지 않아도 생활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으며, 화려한 스펙으로 승승장구하는 사람들이 몹시도 부러웠다. ‘세상에서 나만 이렇게 힘들구나’ 싶은 생각도 무수히 해보았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럴수록 현실은 더 비참했고 서글펐다. 처음부터 그들과 내가 달려야 할 ‘레이스’가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거기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어보였다. 이 길의 끝이 죽음이 아닌, 삶의 길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면서 그 두려운 길을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 보면 비극”이라고 한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나의 삶 역시 희극과 비극을 오고가며 채워졌다.


    아이들이 어렸을 땐 부모가 아이를 키우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다 보니 내가 키운 세월만큼 자라난 아이들이 나를 키우고, 그렇게 자라난 내가 다시 또 아이를 키우면서 서로가 함께 성장해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끊임없이 흔들리며 가다보니 그 뿌리가 땅 밖으로 뽑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땅속 더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가 단단하게 뿌리를 박는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게 흔들리며 걸으면 된다. 우리는 모두 흔들리며 피는 꽃이니까.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