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아름다운 고갱의 미술수업
 
지은이 : 김미진 (지은이), 폴 고갱 (그림)
출판사 : 열림원어린이
출판일 : 2025년 04월




  • 예술 감상은 더 이상 소수의 전유물이 아닌 모두를 위한 교양이며, 인간의 성장을 밝히는 중요한 여정으로 제시됩니다. 인공지능 시대에도 예술교육이 주목받는 이유는 질문하고 느끼는 힘, 즉 인간다움을 키우는 데 예술만큼 강력한 도구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작고 아름다운 고갱의 미술수업


    고갱은 누구인가요?

    고갱은 후기 인상파를 대표하는 프랑스 화가입니다. 1848년 6월 7일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얼마 후, 가족들과 함께 외갓집이 있는 페루로 떠났습니다. 신문 기자였던 아버지가 정치적 망명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항해 도중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불행한 일을 겪게 됩니다.


    외할머니는 스페인 귀족 가문 출신으로 여행가이자 작가였으며 정의와 자유를 위해 싸우는 맹렬한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고갱의 예술가적 기질은 외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듯싶습니다. 페루에서 보낸 4년간의 어린 시절은 훗날 고갱의 작품과 삶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파리로 돌아와 학교를 졸업한 고갱은 한동안 외국을 오가는 배의 견습 선원으로 일합니다. 고갱이 주식 중개상이 된 것은 23세 때의 일입니다. 고갱은 인상파 화가들과 사귀고 그들의 작품을 사들이는 한편, 시간 날 때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고갱이 본격적으로 그림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은 30대 때의 일입니다. 자신이 일하던 주식 시장이 붕괴되자 과감하게 사표를 던진 그는 이제부터 그림만 그려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악화되었고, 그로 인해 가족들과도 헤어진 채 고독과 가난에 쫓기는 떠돌이 예술가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고갱, 하면 떠오르는 것은 방랑자 같은 이미지입니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루앙으로, 브르타뉴로, 그 후에는 고흐가 머물고 있는 아를로, 다시 브르타뉴로······. 다양한 예술가 친구들과도 사귀고 정열적으로 그림도 많이 그렸지만, 삶은 늘 가난하고 혹독한 모습으로 그를 괴롭혔습니다. 마침내 고갱은 먼 남태평양에 있는 타히티섬으로 떠날 결심을 했습니다.


    타히티는 고갱이 늘 꿈꾸던 예술가의 낙원이었습니다. 첫 번째 타히티 방문에서 그는 2년간 머물게 됩니다. 고갱의 전성기 작품들은 바로 이곳 타히티에서 탄생합니다.


    고갱이 다시 파리로 돌아온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도시의 삶은 환멸만을 안겨 주었습니다. 2년 정도 파리에 머물던 그는 그림들을 모두 처분하고는 다시 남태평양으로 떠났습니다. 타히티섬 북쪽에 있는 마르키즈 제도에 정착한 그는 혼신을 다해 작품 제작에 몰두하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 안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1903년, 그의 나이 55세 때의 일입니다.



    고갱 미술관

    강아지 세 마리가 있는 정물화

    1888년, 목판에 유채, 91.8x62.6cm, 현대 미술관, 뉴욕

    동양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림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반적인 원근법으로 배치돼 있지 않고, 대상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 같은 시선이 느껴집니다. 고갱의 작품들 중에서도 특히 독특함을 자아내는 그림으로 평가받는데, 커다란 테이블 위에 균형감 없이 나열된 사물들이 소박함과 불안함. 그리고 여백을 느끼게 합니다. 기교나 색감보다는 예술가 자신만의 양식이 돋보이는 결과를 낳은 작품입니다.



    광륜이 있는 자화상

    1889년, 목판에 유채, 79.2x51.3cm, 국립 미술관, 워싱턴 D.C.

    고갱을 가리켜 보통 탈인상주의 화가라고 부릅니다. 생전에는 크게 평가받지 못했지만 오늘날 고갱의 작품은 강렬한 색채와 원근법을 거스르는 자신만의 독창적 화면 분할로 당대 다른 화가들과 차별화되는 개성으로 높이 평가받습니다. 그런 고갱의 창조력을 강하게 드러내 주고 있는 작품입니다.


    고갱의 자화상은 단순해 보이지만 문학적 상징성을 보여 줍니다. 머리 위의 광륜을 통해 세상의 창조자와 같은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드러내면서 선과 악, 영혼과 육체의 세계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작품을 그린 목판은 당시 고갱이 묵던 여인숙의 찬장 문이었는데, 그는 여인숙에 묵는 동안 벽과 문과 창문에 많은 그림을 남겼습니다.



    밤의 카페, 아를

    1888년, 캔버스에 유채, 72x92cm, 푸시킨 미술관, 모스크바

    아를에 머물던 시절에 반 고흐와 고갱은 모두 이 카페를 즐겨 찾았으며, 밤의 카페 모습을 자주 화폭에 담았다고 전해집니다. 반 고흐가 그린 그림과 비교해 보면 좋은 감상 방법이 되는 작품입니다. 반 고흐도 아를 카페를 그렸습니다. 똑같은 장소를 그렸지만 반 고흐의 그림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고갱은 반 고흐에게 눈앞만 보고 그리지 말고 기억과 상상력을 발휘하라고 조언한 적이 있습니다. 그림 속의 여성은 카페 주인인 마담 지누입니다. 약 한 시간 만에 이 그림을 완성한 고갱을 보며 반 고흐는 부러움과 질투를 동시에 느꼈을 것입니다. 또한 반 고흐가 그린 아를의 여인(지누 부인)과도 비교해 보면 좋은 감상이 될 것입니다. 반 고흐는 마담 지누의 초상화에 책을 그렸습니다. 고갱이 마담 지누의 테이블 위에 술병과 술잔을 그린 것과 상반됩니다. 반 고흐는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고 도움을 주었던 마담 지누를 교양 없는 모습으로 그린 고갱의 행동에 마음이 상했을 것입니다.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1888년, 캔버스에 유채, 73cmx91cm,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반 고흐는 고갱이 그린 자신의 이 모습을 처음 봤을 때는 고갱이 자신을 미친 사람으로 묘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에는 이 작품에 묘사된 자신의 모습이 당시 불안하고 지쳐 있던 반 고흐 자신의 상태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작품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고갱 작품의 색감이나 구도가 반 고흐의 작품가 큰 차이가 있다는 점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노란색을 표현하는 방식도 고갱은 반 고흐와 다르게 채색하고 있습니다. 고갱은 반 고흐의 불완전한 정신세계를 예민하게 발견했던 것 같습니다. 인간 내면의 나약한 흔들림과 광기를 놓치지 않을 만큼의 예리함을 갖춘 화가였다는 점이 잘 드러납니다.



    설교 뒤의 환상(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1888년, 캔버스에 유채, 72.2x91cm, 스코틀랜드 국립 미술관, 에든버러

    창세기 32장 23~31절의 천사와 야곱 이야기를 모티브로 창작된 그림으로, 고갱이 종교적 주제를 처음으로 나타낸 작품입니다. 설교를 들은 뒤 야곱과 천사가 싸우는 성서 한 장면을 환상처럼 바라보는 브르타뉴 지역 여성들을 표현했습니다. 앞쪽의 기도하는 여성들은 현실의 세계를, 상단 결투 장면은 환상을 표현함으로써 현실과 상상 세계의 혼합을 엮었습니다.


    고갱은 반 고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작품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위대하면서도 미신적인 단순함에 도달한 작품이라고 스스로 평했습니다. 고갱이 종교적 면에 심취해 있었다기보다는, 신앙과 미신이 혼합돼 상상과 감성으로 교리를 해석해 가는 인간의 현실을 직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의 미신적 믿음에 대한 고갱의 예민한 관찰은 타히티 시절 작업에서도 발견되는데, 고갱의 감수성과 예술성이 신의 세계로 뻗어 나가는 창조력으로 확장됐습니다.



    아름다운 앙젤

    1889년, 캔버스에 유채, 92x73.2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동양화처럼 보이는 꽃무늬가 그려진 벽지 배경에 여인이 원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 그림은 고갱이 브르타뉴 지역의 작고 아름답고 조용한 항구 도시에서 남긴 작품 중 하나로, 이 근방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시장의 부인 사트르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아름다운 얼굴을 단순히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화면을 분할하여 내적 미학에 도달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지역의 전통 의상을 입은 주인공의 얼굴은 왼편에 보이는 조각물처럼 차갑게 굳어 있고 화면 하단에는 명칭이 적혀 있습니다. 분할이라는 새로운 기법으로 그린 이 작품을 드가가 구입했고, 고갱은 그 돈으로 타히티로 떠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언제 결혼하니?

    1892년, 캔버스에 유채, 105x77cm, 개인 소장품

    타히티섬을 다룬 작품 중 하나로, 1893년 뒤랑 뤼엘 화랑 전시회에서 처음 공개됐습니다. 타히티섬에서 그린 고갱의 작품들은 어머, 질투하는 거니? 왜 화가 나 있니?와 같이 유독 유머러스한 제목이 많습니다.


    제목에서처럼 타히티섬에서의 소박하면서도 일상적인 소재를 나타낸 명작들로, 고갱은 이 시기 타히티섬에서의 생활 속에서 원주민들의 꾸밈없는 생활상을 마음껏 표현했습니다. 두 명의 여인이 화면 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그림은 여인의 다리가 맞닿은 상태인데 각각 움직임과 정지의 모티브를 표현하고 있어 독특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이때 고갱의 그림들을 살펴보면 그가 타히티에서 생활하면서 원주민들을 통해 발견한 인간 본연의 눈부신 아름다움과 본능이 느껴집니다. 고갱은 타히티 시절을 통해 특히 생명체의 모순에 가까이 맞닿았고, 이것이 생명의 현실과 영혼의 색채로 표현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 옛적에

    1892년, 캔버스에 유채, 91x69cm,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마드리드

    작품 전체적으로 서로 다른 색채의 영역으로 이루어진 풍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거대한 나무의 줄기는 공간을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는데, 앞에서는 음악을 연주하고 가운데에는 춤을 춥니다. 이 그림은 실제 장면이나 풍경을 묘사했다기보다는 1892년부터 1894년 사이에 고갱의 여러 작품들에서 발견된 요소들이 재구성돼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타히티를 배경으로 한 큰 노란 나무나 작품 속의 춤을 추는 여인들은 고갱의 여러 다른 작품들에서도 발견되는 요소들입니다.



    테후라

    1892년경, 나무에 조각, 22.2x12.6x7.8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도 평가받는 고갱은 독특하게도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판화, 도예 등에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자신의 그림에 등장하는 도자기 종류를 직접 만들기도 했으며, 그 작품 세계는 원시주의와 인간 본능에 바탕을 둔 것들이 많습니다. 특히 타히티 시절 고갱과 함께했던 여인 테후라의 모습을 조각으로 표현한 작품은 그의 독창성을 상징하는 대표작이 되었습니다.



    신의 날

    1894년, 캔버스에 유채, 68x91cm,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시카고

    예술의 본질적 의미를 찾기 위해 타히티에서의 시간을 보낸 뒤 1893년 고갱은 프랑스로 돌아와 타히티에서의 경험을 예술로 승화시켜 자서적 성격의 창작을 시작하는데 이 기간 제작된 신의 날은 남태평양섬에서의 독특한 경험을 함축적이고도 총체적으로 담아낸 명작으로 평가받습니다.


    특히 고갱의 미술 철학은 종교적 정신에 닿아 있어 산과 오두막 그리고 나무들을 배경으로 한 해변에 솟은 신 조각과 종교의식을 행하는 원주민들의 모습이 혼합돼 있습니다. 그의 다른 많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때 작품 속 신 조각은 불교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며 춤추는 사람들과 피리 연주자, 신에게 바칠 음식을 나르는 인물들이 누워 있는 여인들과 어우러져 인간의 탄생, 삶, 죽음의 신비로운 믿음을 보여 줍니다. 고갱은 의도적으로 작품의 목적을 드러내기보다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복잡하고도 모순적인 인간과 신의 세계의 상징성을 다양하게 해석하도록 열어 두었습니다.



    하얀 말

    1898년, 캔버스에 유채, 140.5x92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타히티에서 그린 이 작품은 타히티의 실제 풍경이라기보다는 고갱의 상상으로 융합해 낸 작품입니다. 부라오라고 불리던 토종 나무의 뒤틀린 가지와 상상의 꽃이 주되게 묘사된 이 그림은, 수직으로 흐르는 물가의 한가운데 서서 물을 마시는 백마를 표현했습니다. 고독한 말의 모습을 통해, 고갱은 다른 세계로 영혼이 떠나간다 믿었던 타히티 사람들의 폴리네시아적 상징성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벌거벗은 형체가 뒤에서 말을 타고 멀리 달리는 풍경을 통해 수직적이고 평평한 시야를 강조한 고갱은 초록과 짙은 파랑을 통해 오렌지빛과 대조를 이루게 했습니다. 창작 당시에는 말의 색채가 기묘하다고 낮게 평가되기도 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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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