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eat Disruption
거대한 단절의 시대
 
지은이 : Srividya Jandhyala
출판사 : Cambridge University Press
출판일 : 202506







거대 단절, 기업으로 들어온 지정학의 시간과 일의 재편

기업의 세계는 오랫동안 “정치는 배경, 시장은 전면”이라는 전제를 깔고 움직였다. 규칙은 비교적 안정적이고, 경쟁은 가격과 품질, 기술과 규모의 문제로 정리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배경이 전면으로 걸어 나왔다. 전쟁과 제재, 수출통제와 투자심사, 공급망 재편과 동맹의 선택이 매출과 채용, 연구개발과 공장 입지 같은 가장 실무적인 결정들을 직접 흔들기 시작했다. ‘지정학이 기업에 영향을 준다’는 진부한 문장이 아니라, 지정학이 기업의 운영 언어 자체를 바꾸는 국면이 열린 것이다.

시장의 논리 위에 덮친 안보의 논리
최근 세계경제의 많은 갈등은 ‘효율’보다 ‘안보’를 먼저 묻는다. 무엇을 가장 싸게 만들 수 있는지보다, 무엇을 끊기지 않게 만들 수 있는지가 우선순위가 된다. 이때 리스크는 더 이상 환율이나 원자재 가격의 변동성에만 있지 않다. 법과 규제, 외교 관계, 군사적 긴장이 거래의 조건이 되고, 특정 기술과 부품은 갑자기 “사면 안 되는 것”이 되거나 “팔면 안 되는 것”이 된다. 그 결과 기업은 비용 최소화의 게임에서, 허용되는 선택지 안에서 최선의 생존 경로를 찾는 게임으로 밀려난다.

여기서 가장 큰 변화는 ‘경쟁’의 기준이 바뀐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경쟁사가 더 싸게 만들면 그 이유를 공정 효율이나 인건비, 자동화 수준에서 찾았다. 지금은 그 이유가 ‘허용된 접근권’에 있을 수 있다. 어떤 기업은 특정 시장에 들어갈 수 있고, 어떤 기업은 같은 제품을 만들어도 수출허가를 못 받아 판매가 막힌다. 그러면 기업이 잘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국제정치가 허락한 범위 안에서만 이긴다. 이 순간부터 시장은 더 이상 중립적인 심판이 아니라, 규칙을 자주 바꾸는 경기장이 된다.

속도도 문제다. 지정학적 사건은 단발로 끝나지 않고 연쇄 반응을 만든다. 한 번의 제재가 결제망과 물류를 흔들고, 그 충격이 보험료와 납기, 계약 조건으로 번역된다. 기업 내부에서 보이는 모습은 아주 구체적이다. “이번 분기 납품이 가능한가.” “대체 공급처가 실제로 존재하는가.” “법무·컴플라이언스가 허용하는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거시적 격변은 결국 현장에서는 체크리스트의 문장으로 내려앉는다.

더 까다로운 건, 안보의 논리가 들어오면 ‘최적화’가 아니라 ‘정렬’이 중요해진다는 점이다. 공급망, 기술, 고객, 투자자의 이해관계를 한 방향으로 정렬하지 못하면 조직은 내부에서부터 갈라진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일부 이해관계자에게는 배신이 되기 쉽고, 그래서 경영은 설득의 문제가 아니라 갈등을 관리하는 기술이 된다.

공급망은 ‘길’이 아니라 ‘지도’가 됐다
예전의 공급망이 길이었다면, 지금의 공급망은 지도다. 길은 효율의 방향으로 뻗지만, 지도는 금지구역과 경계선, 통과 조건을 보여준다. 같은 공장이더라도 어떤 국적의 장비를 쓰는지, 어떤 데이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어떤 파트너가 어떤 국가의 규제망에 걸리는지에 따라 ‘가능한 공급망’과 ‘불가능한 공급망’이 갈린다.

이 변화는 “생산을 분산하면 된다”는 단순 처방으로 끝나지 않는다. 분산은 비용이 들고, 비용은 가격으로 전가되며, 가격은 수요를 줄일 수 있다. 즉, 회복탄력성(resilience)은 윤리적 구호가 아니라 재무적 선택이 된다. 더 안전한 경로를 택할수록 느려지고 비싸지기 쉽다. 반대로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택할수록 특정 국가·특정 기술에 대한 의존이 깊어진다. 결국 기업은 “최저비용”이 아니라 “감당 가능한 취약성”을 계산하는 조직으로 바뀐다.

지도형 공급망의 특징은 ‘우회로’가 필요하다는 데 있다. 평상시에는 가장 빠른 길이 정답이지만, 위기에서는 우회로가 있는 쪽이 살아남는다. 문제는 우회로가 평소에는 비효율로 보인다는 점이다. 평상시에 남는 재고, 이중화된 부품, 여러 국가에 흩어진 협력사 구조는 비용 센터로 취급되기 쉽다. 그러나 한 번의 단절이 오면 그 비용 센터가 갑자기 생존 장치로 바뀐다. 그래서 기업은 평소에는 욕을 먹고, 위기에서는 칭찬받는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여기서 실무가 가장 크게 바뀌는 영역이 ‘가시성’이다. 지도는 보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공급망을 재편한다는 말은 단지 공장을 옮긴다는 뜻이 아니라, 2차·3차 협력사까지 포함한 부품 흐름, 데이터 흐름, 결제 흐름을 추적해 “어디서 끊길 수 있는지”를 미리 파악한다는 뜻이다. 결국 경쟁력은 생산 능력뿐 아니라 추적 능력과 시뮬레이션 능력으로 확장된다.

경영자의 새 역량, ‘정치가 섞인 경영’을 운영하기
지정학이 기업의 전면으로 들어오면, 관리자에게 요구되는 능력도 바뀐다. 전략은 더 이상 시장분석만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규제, 여론, 동맹, 제재, 국가안보 논리가 한 번에 얹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요한 역량은 강한 메시지가 아니라 판단의 기준이다. 어떤 시장에서 철수해야 하는지, 어디까지는 버텨야 하는지, 어느 위험은 보험으로 전가할 수 있지만 어느 위험은 조직이 직접 떠안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 말이다.

이 환경에서 경영자는 ‘두 개의 시간’을 동시에 산다. 시장의 시간은 분기 실적과 제품 사이클로 움직이지만, 정치의 시간은 선거와 외교 이벤트, 예기치 못한 분쟁으로 움직인다. 시장의 시간은 예측이 가능하지만, 정치의 시간은 종종 예측을 조롱한다. 그래서 경영자는 숫자와 계획을 들고도, 계획이 무너졌을 때 무엇을 먼저 지킬지를 정해둬야 한다. 그 기준이 없으면 조직은 위기 때마다 갈팡질팡하고, 그 흔들림이 더 큰 비용으로 돌아온다.

또 하나의 착각이 있다. “정치 리스크는 대관이 해결한다”는 식의 분업 논리다. 물론 전문 기능은 필요하지만, 지금의 환경에서는 정치적 변수의 영향이 너무 넓어서 특정 부서의 과제로 격리되지 않는다. 연구개발은 기술규제와 연결되고, 인사는 비자·이민정책과 맞물리며, 재무는 제재·결제망과 직결된다. 지정학은 기업의 옆문으로 들어오는 변수가 아니라, 기업의 모든 문을 동시에 두드리는 변수가 된다.

따라서 리더십의 핵심은 ‘정답을 선언하는 힘’이 아니라 ‘충돌을 정리하는 힘’으로 이동한다. 예컨대 어떤 국가에서는 성장을 위해 투자해야 하지만, 그 투자가 다른 국가에서는 위험한 신호가 될 수 있다. 고객을 잃지 않기 위해 발언을 조심하면 내부 구성원에게는 비겁함으로 비칠 수 있고, 내부 결속을 위해 강한 언어를 쓰면 외부 파트너에게는 불안으로 읽힐 수 있다. 이 딜레마를 견디는 리더십은 결국 원칙을 단순화하는 능력이 아니라 원칙을 운영 가능한 규칙으로 번역하는 능력이다.

일의 재편, 커리어는 ‘역량’만이 아니라 ‘위치’가 된다
지정학의 충격은 기업만이 아니라 ‘일’에도 남는다. 어떤 산업은 보조금과 규제 변화로 갑자기 성장하고, 어떤 산업은 수출통제 한 번에 시장이 닫힌다. 인재의 이동도 달라진다. 글로벌 인재 흐름은 항상 열려 있지 않고, 국경은 인재시장에도 다시 영향을 준다. 결국 개인의 커리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만큼 “어디에 속해 있는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의 변수에 더 민감해진다.

이 변화는 직장인의 감각을 바꾼다. 이전에는 ‘스킬 업’이 미래를 보장하는 가장 확실한 전략처럼 여겨졌다. 지금은 스킬이 있어도, 그 스킬이 속한 기술 영역이 규제의 표적이 되거나, 특정 국가와의 연결이 리스크로 간주되는 순간 가치가 흔들릴 수 있다. 반대로 과거에는 주변부였던 직무?컴플라이언스, 공급망 리스크, 규제 대응, 데이터 거버넌스?가 핵심 직무로 떠오른다. 즉, 일의 세계는 “잘하는 사람”의 경쟁을 넘어, 환경이 요구하는 능력의 재배치가 일어난다.

조직은 구성원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된다. 단순히 업무를 잘하는 사람보다, 불확실성을 견디며 우선순위를 조정할 수 있는 사람, 규제·문화·정치적 함의를 읽고 커뮤니케이션을 설계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진다. 일의 기술이 ‘전문성’에서 끝나지 않고, 환경을 해석하는 능력까지 포함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노동의 정서에도 영향을 준다. 예측 가능한 커리어 사다리가 짧아질수록 사람들은 안전을 원하고, 안전이 보장되지 않을수록 조직에 대한 충성은 줄어든다. 반대로 조직은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더 강한 결속을 요구한다. 이 간극이 커질 때, 중요한 것은 복지나 연봉만이 아니라 “이 조직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 수 있는가”라는 경로의 신뢰다.

한국에 남는 함의, “세계화 이후”의 생존 설계
한국 기업은 이 변화의 최전선에 있다. 수출 비중이 크고, 반도체·배터리·조선·방산·디스플레이·자동차처럼 지정학의 온도가 높은 산업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같은 단순 선택이 아니다. 더 현실적인 질문은 다음이다.

첫째, 규제와 제재를 ‘사후 대응’이 아니라 ‘설계 변수’로 넣고 있는가. 규제가 나온 뒤에 서류를 맞추는 방식으로는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제품 설계, 데이터 구조, 협력사 계약 단계에서부터 규제 충돌 가능성을 줄이는 구조가 필요해진다. 둘째, 공급망 분산을 비용이 아니라 보험으로 계산하고 있는가. 보험은 평소에는 아깝지만, 사고가 나면 존재 이유가 증명된다. 셋째, 데이터·기술·인력 이동이 막힐 때의 대안을 조직 단위로 갖고 있는가. 어느 국가에서 개발한 기술을 다른 국가에서 상용화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대체 경로’가 없던 기업은 시간이 아니라 존립을 잃는다.

한국의 정책 역시 “산업 육성”만으로는 부족해진다.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지정학적 리스크(제재 충돌, 갑작스러운 규정 변경, 수출통제의 파급)를 완충해 줄 정보·외교·제도 인프라가 중요해진다.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정책 커뮤니케이션, 규제 변화의 신호를 조기에 제공하는 체계, 기업이 새로운 시장을 탐색할 수 있도록 돕는 외교적 안전장치가 함께 필요하다. 기업은 기업대로 리스크를 분산하고, 국가는 국가대로 기업의 선택지가 급격히 사라지지 않도록 ‘가능한 범위’를 넓혀줘야 한다.

또 하나의 함의는 ‘중견·중소기업’이다. 대기업은 분산과 이중화에 투자할 여력이 있지만, 중소기업은 단절 한 번에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 한국이 진짜로 강해지려면, 몇몇 챔피언 기업만이 아니라 연결된 생태계 전체의 회복탄력성을 키워야 한다. 납품 단가 협상 같은 미시적 이슈도 지정학의 충격 앞에서는 국가 경쟁력의 구성요소로 바뀐다. 거대 단절의 시대에 경쟁력은 혁신만이 아니라, 끊김을 버티는 체력에서 나온다.

단절 이후를 읽는 법, “뉴스”가 아니라 “구조”로
지정학은 종종 사건처럼 보이지만, 기업에 남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구조다. 어떤 충격이 왔는지보다, 그 충격이 조달·생산·판매·인재·기술 중 어디를 통해 조직 안으로 스며드는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이 구조를 읽는 힘은 불안의 시대에 가장 실무적인 능력이 된다.

구조로 읽는다는 것은, 사건을 ‘찬반’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경로’를 파악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제재가 발표되면 “누가 옳냐”보다 “우리의 결제는 어떤 통로를 쓰는가”, “핵심 부품의 원산지와 대체 가능성은 무엇인가”, “고객 계약의 면책 조항은 어디까지인가” 같은 질문이 먼저 와야 한다. 즉, 불확실성을 줄이는 방법은 감정의 확신이 아니라, 연쇄반응의 지도를 그리는 것이다.

거대 단절은 단지 세계가 더 위험해졌다는 말이 아니다. 세계가 위험해진 만큼, 기업의 판단 기준과 일의 방식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정상으로 돌아갈 것인가”가 아니라, “정상이 바뀐 세계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운영할 것인가”다. 그 기준이 서야 조직은 단절을 공포가 아니라 관리 가능한 변수로 바꾸고, 개인은 커리어를 운이 아니라 설계로 조금 더 끌어올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