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volutionary Center: The Lost Genius of Liberalism
극단의 시대, 중도의 혁명
 
지은이 : Adrian Wooldridge
출판사 : Pegasus Books
출판일 : 202604








혁명적 중도, 다시 자유주의를 발명하다

중도는 언제부터인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자리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중도는 타협의 기술이 아니라 낡은 질서를 무너뜨린 개혁의 언어였다. 지금 필요한 질문은 단순하다. 자유주의는 다시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힘이 될 수 있는가.

[Key Message]
* 중도는 무기력한 타협이 아니라 개혁의 자리다. 자유주의의 중도는 좌우의 평균값이 아니라, 권력과 특권이 굳어지는 곳을 의심하고 해체하려는 정치적 태도다. 낡은 질서와 극단의 단순한 구호 사이에서 복잡한 현실을 끝까지 다루려는 용기가 중도의 핵심이다.

* 자유주의는 대중의 언어를 잃으면서 약해졌다. 자유, 개방, 경쟁, 세계화, 혁신이라는 말이 많은 사람의 실제 불안과 멀어지면서 자유주의는 설득력을 잃었다. 일자리 상실, 주거 불안, 지역 공동체 붕괴, 계층 이동의 단절을 설명하지 못할 때 포퓰리즘이 그 빈자리를 차지한다.

* 자유는 제도와 신뢰 위에서만 작동한다. 자유는 국가가 물러난다고 자동으로 생기지 않는다. 공정한 법, 좋은 교육, 독점 없는 시장, 신뢰받는 공공기관, 실패 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 있어야 개인의 자유도 현실이 된다.

* 새로운 자유주의는 시장과 국가를 동시에 감시해야 한다. 시장만능주의도, 국가만능주의도 오늘의 위기를 해결하지 못한다. 자유주의는 기업 독점과 관료주의, 플랫폼 권력과 국가 권력 모두를 견제하면서 공정한 경쟁과 사회적 안전망을 함께 설계해야 한다.

* 자유주의의 회복은 자기비판에서 시작된다. 자유주의는 과거의 성취만 내세워서는 다시 힘을 얻을 수 없다. 세계화의 상처, 능력주의의 세습화, 기술 엘리트의 오만, 공동체 붕괴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자유를 안전·공정·소속·존엄과 다시 연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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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과감했던 정치 언어
중도라는 말은 오늘날 힘이 약하다. 정치가 양끝으로 갈라질수록 중도는 흐릿한 회색지대처럼 보인다. 강한 신념도 없고, 선명한 분노도 없고, 결단도 없는 사람들의 임시 거처처럼 취급된다. 한쪽에서는 시장과 전통을 지키자고 외치고, 다른 한쪽에서는 국가와 평등을 앞세운다. 그 사이에 있는 사람들은 종종 양쪽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로 오해받는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처음 등장했던 시대를 돌아보면, 이 이미지는 거의 정반대에 가깝다. 자유주의적 중도는 조용한 절충이 아니라, 왕권과 특권, 신분과 폐쇄적 질서에 맞선 가장 과감한 정치 언어였다.

자유주의가 태어난 세계는 닫힌 세계였다. 태어난 신분이 삶의 범위를 정했고, 종교와 사상은 권력의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경제 활동은 특권 집단과 길드, 지역 장벽에 묶여 있었다. 개인은 스스로 인생을 설계하는 존재라기보다, 국가와 교회와 관습이 정해놓은 자리 안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였다. 그 세계에서 “개인은 권리의 주체다”라는 말은 결코 온건하지 않았다. “법 앞에서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는 말도 위험했다. “표현과 출판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 역시 기존 권력에는 위협이었다. 자유주의는 처음부터 세상의 기본 배치를 흔드는 사상이었다.

자유주의의 힘은 추상적인 자유 찬양에만 있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장벽을 하나씩 찾아내고, 그것을 제도로 해체하는 능력이었다. 법치, 의회, 언론 자유, 종교적 관용, 사유재산, 계약의 자유, 공정한 경쟁, 직업 선택의 자유, 교육을 통한 사회 이동성은 모두 인간을 고정된 자리에서 풀어내는 장치였다. 자유주의는 “마음대로 하라”는 방임이 아니었다. 권력과 특권이 인간의 미래를 독점하지 못하게 만드는 제도적 상상력이었다.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힘은 바로 개혁성이다. 한때 자유주의는 닫힌 세계를 여는 언어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유주의는 기존 질서를 관리하는 언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금융시장, 세계화, 고학력 엘리트, 국제기구, 전문관료, 대도시 중산층의 언어로 좁아졌다. 더 많은 사람에게 기회를 열어주는 약속으로 들리지 않고, 이미 기회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질서를 방어하는 논리처럼 들릴 때 문제가 시작된다. 자유주의가 낡아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개혁적 기원을 잊었기 때문에 낡아 보이게 된 것이다.

대중의 언어를 잃은 자유주의
현대 자유주의는 많은 것을 성취했다. 개인의 권리는 넓어졌고, 시장은 수많은 사람을 빈곤에서 끌어냈으며, 교육과 기술은 삶의 선택지를 확장했다. 여성과 소수자, 종교적·문화적 차이에 대한 권리 의식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민주주의 제도는 권력을 교체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고, 법치주의는 권력자의 자의적 지배를 제한했다. 자유주의적 질서가 없었다면 오늘의 개방사회, 시민권, 지식경제, 세계적 교류는 지금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성취가 크다고 해서 실패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세계화는 소비자에게 값싼 상품을 제공했지만, 어떤 지역에는 공장 폐쇄와 일자리 상실을 남겼다. 기술 혁신은 편리함과 생산성을 높였지만, 중간 숙련 노동의 기반을 흔들었다. 능력주의는 신분제보다 공정해 보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교육과 자산을 가진 계층이 유리한 출발선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방식으로 굳어졌다. 다양성과 개방성의 언어는 많은 사람의 권리를 넓혔지만, 일부 대중에게는 자기 삶의 감각과 문화가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문제는 이런 균열을 자유주의가 충분히 정직하게 설명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에게 세계화의 장기적 이익을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집값과 교육비 때문에 미래를 계획하기 어려운 청년에게 개인의 선택과 책임만 강조하는 것도 잔인하게 들릴 수 있다. 지역 공동체가 무너지고, 안정된 일자리가 사라지고,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끊어진 사회에서 개방과 혁신은 희망의 말이 아니라 불안을 미화하는 말처럼 들린다.

정치 언어는 현실을 설명할 수 있을 때 힘을 갖는다. 자유, 경쟁, 다양성, 세계화, 혁신 같은 단어들이 사람들의 실제 경험과 어긋나기 시작하면, 그 빈자리는 다른 언어가 차지한다. “당신이 힘든 것은 적응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누군가 당신의 몫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나라가 망가진 것은 엘리트가 국민을 배신했기 때문이다.” “복잡한 제도와 토론은 필요 없다. 강한 지도자가 바로잡으면 된다.” 포퓰리즘은 바로 이 틈에서 자란다. 자유주의가 불안을 설명하지 못할 때, 분노는 더 단순하고 더 거친 이야기를 찾는다.


포퓰리즘이 차지한 빈자리
포퓰리즘은 자유주의의 바깥에서 갑자기 나타난 돌발 현상이 아니다. 자유주의가 대답하지 못한 질문들이 쌓인 결과다. 의회는 말만 많고, 관료는 느리며, 전문가는 현실을 모른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 포퓰리즘은 힘을 얻는다. 법과 제도가 강자에게는 방패가 되고 약자에게는 장벽이 된다고 여겨질 때, 자유주의의 핵심 장치들은 불신의 대상이 된다. 법치주의는 특권층 보호 장치처럼 보이고, 언론 자유는 엘리트 담론의 독점처럼 보이며, 독립 기관은 민의를 가로막는 관료 권력처럼 보인다.

포퓰리즘은 복잡한 문제를 단순한 이야기로 바꾼다. 사회는 선한 국민과 부패한 엘리트로 나뉘고, 고통의 원인은 배신자와 외부자에게 돌려진다. 이런 이야기는 위험하지만 강력하다. 경제 구조, 기술 변화, 국제 무역, 교육 격차, 지역 불균형처럼 복잡한 원인을 따지는 일은 어렵고 피곤하다. 반면 “저들이 당신의 삶을 망쳤다”는 말은 쉽고 빠르며 감정적으로 선명하다. 피로한 사회에서 단순한 분노는 복잡한 설명보다 훨씬 빨리 퍼진다.

포퓰리즘이 건드리는 감정은 분노만이 아니다. 더 깊은 곳에는 소속의 상실이 있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강하지만, 사람들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무엇을 함께 지켜야 하는지, 왜 서로를 책임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약한 언어를 갖고 있었다. 개인이 자유롭다는 말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개인이 고립되고 불안정해질 때 자유는 공허해진다. 선택지는 많아졌지만 안정된 삶은 줄어들고, 이동성은 커졌지만 지역 공동체는 약해졌으며, 표현의 자유는 넓어졌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공통 언어는 빈약해졌다. 이때 사람들은 자유보다 소속을 먼저 찾는다.

따라서 포퓰리즘을 단순히 무지와 선동의 결과로만 보는 태도는 충분하지 않다. 포퓰리즘은 거짓을 섞지만, 실제 불안을 이용한다. 자유주의가 그 불안을 비합리적 분노로만 치부하면 다시 대중을 잃는다. 자유주의가 복원되려면 포퓰리즘의 거짓을 비판하는 동시에, 포퓰리즘이 낚아챈 진짜 고통을 자기 언어로 다시 설명해야 한다. 사람들의 삶이 왜 흔들리는지, 무엇이 공정하지 않은지, 어떤 제도가 무너졌는지, 어떻게 다시 기회를 만들 수 있는지 말해야 한다. 비난만으로는 자유주의가 돌아오지 않는다. 더 나은 설명과 더 실질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자유는 제도 위에서만 살아남는다
자유주의의 핵심은 개인의 존엄이다. 사람은 국가와 집단의 부속물이 아니며, 각자의 삶을 스스로 설계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자유는 홀로 서 있지 못한다. 자유가 실제 삶에서 작동하려면 그것을 떠받치는 제도가 필요하다. 법은 공정해야 하고, 교육은 계층 이동의 통로가 되어야 하며, 시장은 독점과 특권으로 굳어지지 않아야 한다. 언론은 권력을 감시해야 하고, 공공기관은 신뢰를 잃지 않아야 하며, 시민은 서로 다른 의견을 적으로만 보지 않는 훈련을 해야 한다.

자유는 단순히 국가가 물러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좋은 제도와 사회적 신뢰 위에서만 지속된다. 시장이 자유롭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자본과 정보, 교육을 가진 사람에게 경쟁은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기반이 약한 사람에게 같은 경쟁은 불안과 탈락의 다른 이름이 된다. 반대로 국가가 보호를 약속한다고 해서 자유가 자동으로 커지는 것도 아니다. 국가는 위험을 줄일 수 있지만, 모든 삶을 대신 설계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큰 정부냐 작은 정부냐가 아니다. 어떤 제도가 사람들에게 실제 선택의 능력을 주는가가 핵심이다.

자유주의가 다시 힘을 얻으려면 자유의 의미를 더 두껍게 만들어야 한다. 단순한 방임의 자유가 아니라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역량의 자유, 고립된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제도 속의 자유, 특권층의 이동성이 아니라 더 넓은 사회적 이동성의 자유가 필요하다. 자유가 삶의 조건과 연결되지 않으면 자유주의는 빈말이 된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반, 노력하면 삶이 조금씩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 규칙이 강자에게만 유리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을 때 자유는 설득력을 얻는다.

책임의 언어도 되살아나야 한다. 자유는 책임과 함께 있을 때 성숙해진다. 표현의 자유는 상대를 침묵시키지 않는 태도와 함께 있어야 하고, 경제적 자유는 공정한 규칙을 지키려는 책임과 함께 있어야 한다. 개인의 선택은 타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는 감각과 함께 있어야 한다. 오늘의 자유주의가 약해진 이유 중 하나는 권리의 언어는 강하게 남았지만 책임의 언어는 빈약해졌기 때문이다. 권리는 강조하지만 의무는 약하게 말하고, 선택은 말하지만 그 선택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결과는 충분히 묻지 않는다. 이 균형이 무너지면 자유주의는 쉽게 이기주의로 오해받는다.

큰 정부와 작은 정부를 넘어
오늘의 정치 논쟁은 여전히 큰 정부와 작은 정부라는 낡은 틀에 갇혀 있다. 한쪽은 국가가 더 많이 개입해야 불평등과 시장 실패를 고칠 수 있다고 말한다. 다른 한쪽은 국가가 물러나야 개인과 기업의 창의성이 살아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21세기의 현실은 이 단순한 구도를 벗어난 지 오래다. 플랫폼 독점, 인공지능, 기후 위기, 공급망 재편, 고령화, 주거 불안, 지역 소멸, 교육 격차 같은 문제는 국가가 손을 놓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국가가 모든 것을 직접 관리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규모의 논쟁이 아니라 역량의 논쟁이다. 자유주의적 국가는 약한 국가가 아니다. 자유주의가 반대하는 것은 무능한 간섭과 자의적 권력이지, 공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국가 역량 자체가 아니다. 법치와 시장, 개인의 자유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오히려 국가는 충분히 유능해야 한다. 독점을 감시하고,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며, 교육과 인프라를 제공하고, 사회적 위험을 완화하며, 장기적 투자를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국가가 커지는가 작아지는가가 아니라, 국가가 특권집단의 포획에서 벗어나 공정한 심판자이자 미래 설계자로 기능할 수 있는가다.

시장 역시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자유주의가 시장을 옹호해온 이유는 시장이 단순히 돈을 많이 벌게 해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장은 본래 특권과 독점에 맞서는 개방의 장치였다. 누구나 진입할 수 있고, 능력과 아이디어로 경쟁할 수 있으며, 권력자의 허가 없이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장은 해방적이었다. 그러나 시장이 거대 기업의 독점, 알고리즘의 지배, 금융 자본의 과잉, 부의 세습 구조와 결합하면 더 이상 자유의 장치가 아니라 새로운 특권의 장치가 된다. 시장을 지키려면 시장만능주의가 아니라 반독점, 공정경쟁, 투명한 규칙, 사회적 이동성을 함께 지켜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중도는 다시 혁명적이 될 수 있다. 중도는 좌우의 평균값이 아니다. 권력의 집중을 의심하는 태도다. 국가 권력이든 기업 권력이든, 관료 권력이든 플랫폼 권력이든, 지식 엘리트의 권력이든, 어떤 권력도 견제 없이 굳어지면 자유를 갉아먹는다. 따라서 새로운 자유주의는 시장과 국가를 동시에 감시해야 한다. 관료주의의 비효율과 기업 독점의 탐욕을 함께 비판해야 한다. 개인의 권리와 공동체의 안정, 경제적 역동성과 사회적 안전망을 서로 적으로 만들지 않는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

한국 사회가 마주한 자유주의의 시험
자유주의의 위기는 서구 정치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사회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한국은 짧은 시간 안에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 디지털 전환을 모두 통과했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권리와 선택지는 크게 넓어졌다. 교육과 시장은 많은 사람에게 상승의 통로를 제공했고, 민주주의는 권력 교체의 제도적 기반을 만들었다. 그러나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랐던 만큼 균열도 깊다. 경쟁은 기회를 만들었지만 동시에 삶을 소진시켰고, 능력주의는 신분제보다 공정해 보였지만 어느 순간 출발선의 격차를 정당화하는 언어가 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가 가장 취약해지는 지점은 공정의 감각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노력과 선택을 존중하지만, 그 노력이 평가받는 구조가 공정하다는 믿음이 있어야 작동한다. 입시, 채용, 부동산, 병역, 세금, 법 집행에서 공정성이 의심받으면 자유주의의 언어는 빠르게 힘을 잃는다. 사람들은 자유보다 분노를 먼저 느끼고, 절차보다 응징을 요구한다. 법치가 신뢰를 얻지 못하면 강한 처벌의 언어가 인기를 얻고, 의회가 문제 해결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강한 지도자에 대한 욕망이 커진다. 이것은 어느 한 진영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주의적 제도 전체의 신뢰 문제다.

표현의 자유와 사회적 존중 사이의 긴장도 커지고 있다. 한국 사회는 빠르게 다양해졌지만, 서로 다른 가치관이 공존하는 훈련은 충분히 축적되지 않았다. 젠더, 세대, 지역, 이념, 역사 인식, 노동, 교육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쉽게 도덕적 전쟁으로 바뀐다. 상대를 설득할 대상으로 보기보다 제거해야 할 위험으로 보는 태도가 강해진다. 이때 자유주의의 핵심인 관용과 토론은 약해진다. 관용은 모든 의견을 똑같이 옳다고 인정하는 태도가 아니다. 싫어하는 의견도 폭력과 억압 없이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정치적 기술이다.

청년 세대의 불안도 자유주의의 미래를 가르는 중요한 지점이다. 자유주의는 “스스로 선택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선택의 비용이 지나치게 커진 사회에서 이 말은 쉽게 부담이 된다. 집을 사기 어렵고, 안정된 일자리를 얻기 어렵고, 결혼과 출산이 경제적 모험이 되며, 노후가 점점 더 개인의 책임으로 밀려나는 상황에서 자유는 해방이 아니라 위험이 된다. 새로운 자유주의는 개인에게 더 많은 선택을 요구하기 전에, 선택할 수 있는 기반을 어떻게 회복할지 물어야 한다. 주거, 교육, 노동, 돌봄, 지역의 기회가 무너지면 개인의 자유는 명목상으로만 남는다.

다시 싸우는 자유주의
자유주의가 다시 살아나려면 방어적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도 지금 체제가 최악은 아니다”라는 식의 소극적 변명으로는 대중을 설득할 수 없다. 사람들은 지금의 삶이 불안하다고 느끼는데, 과거의 성과만 말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자유주의는 자신이 만든 세계의 성취뿐 아니라 실패도 인정해야 한다. 세계화가 남긴 지역적 상처, 능력주의가 만든 새로운 세습, 시장의 독점화, 기술 엘리트의 권력, 정치적 올바름을 둘러싼 피로, 공동체의 해체를 정직하게 다루어야 한다. 자기비판 없는 자유주의는 도덕적 우월감으로 보이고, 도덕적 우월감은 오늘의 정치에서 쉽게 반감을 부른다.

그러나 자기비판에만 머물러서도 안 된다. 자유주의는 여전히 강력한 자산을 갖고 있다. 그것은 오류를 인정하고 고칠 수 있는 능력이다. 권위주의는 실패를 숨기고, 포퓰리즘은 책임을 외부의 적에게 돌리며, 극단주의는 의심을 배신으로 간주한다. 반면 자유주의는 공개 토론, 권력 교체, 사법적 견제, 언론의 감시, 시민사회의 비판을 통해 스스로를 수정할 수 있다. 자유주의의 힘은 완벽함이 아니라 수정 가능성에 있다. 한 번 정한 정답에 세상을 맞추는 이념이 아니라,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계속 고쳐나가는 정치적 방법이라는 점이 핵심이다.

오늘 필요한 자유주의는 더 선명해야 한다. 표현의 자유를 지키되 허위와 선동이 공론장을 파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시장의 역동성을 살리되 독점과 세습이 경쟁을 죽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되 공동체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아야 한다. 국가의 역할을 인정하되 관료주의와 권력 남용을 경계해야 한다. 다양성을 존중하되 사회를 끝없는 정체성 전쟁으로 찢어놓지 않아야 한다. 이런 균형은 쉽지 않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원래 쉬운 길을 약속한 적이 없다. 자유주의는 인간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전제로, 그 차이를 폭력 없이 관리하려는 고도의 문명적 기술이다.

결국 자유주의의 미래는 중도가 다시 용기를 가질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여기서 중도는 양쪽의 평균값이 아니다. 극단의 분노에 굴복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다. 시장을 믿지만 시장의 실패를 인정하고, 국가를 활용하지만 국가의 오만을 경계하며,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지만 개인을 고립시키지 않는 정치적 상상력이다. 중도는 흐릿한 회색지대가 아니라, 복잡한 세계를 복잡한 채로 다루려는 용기다. 단순한 구호가 난무하는 시대일수록 이 용기는 더 드물고 더 중요하다.

혁명은 반드시 극단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 때로 가장 깊은 변화는 인간을 하나의 정체성, 하나의 계급, 하나의 진영, 하나의 분노에 가두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복잡한 사회를 단순한 적대의 언어로 쪼개지 않고, 서로 다른 이해와 욕망이 공존할 수 있는 제도를 다시 설계하는 일은 그 자체로 대담한 개혁이다. 자유주의가 다시 대중의 언어가 되려면 자유를 안전, 공정, 소속, 존엄과 다시 연결해야 한다. 자유는 법 조항 속의 권리가 아니라, 실제로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어야 한다. 개방은 국경을 여는 구호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기회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제도여야 한다. 공정은 경쟁의 결과를 받아들이라는 명령이 아니라, 경쟁의 출발선과 규칙을 끊임없이 점검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자유주의는 끝난 이념이 아니다. 다만 너무 오래 자신이 이긴 세계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제 다시 싸워야 한다. 특권과 독점에 맞서고, 무능한 제도와 오만한 엘리트에 맞서고, 분노를 이용하는 포퓰리즘과 두려움을 먹고 자라는 권위주의에 맞서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안의 게으름과도 싸워야 한다. 자유주의가 다시 살아나는 순간은 자유를 말하는 사람들이 불안한 사람들의 삶을 실제로 바꿀 수 있을 때다. 그때 중도는 더 이상 무기력한 타협이 아니라, 무너진 공통의 세계를 다시 세우는 가장 어려운 개혁의 이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