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oom Loop
파멸의 고리, 세계 경제질서는 왜 무질서로 소용돌이치는가
 
지은이 : Eswar S. Prasad
출판사 : Basic Venture
출판일 : 202602







세계경제는 왜 무질서의 고리로 빨려 들어가는가


세계경제를 안정시킨다고 믿었던 힘들이 이제는 오히려 불안의 원인이 되고 있다. 세계화는 번영을 넓혔지만 불평등과 정치적 반발을 키웠고, 강대국 경쟁은 협력의 언어를 힘의 언어로 바꾸고 있다. 미국이 주도한 전후 경제질서가 흔들리는 지금, 필요한 것은 과거로의 복귀가 아니라 새로운 규칙과 제도의 재설계다.

[Key Message]
* 세계경제를 안정시킨다고 믿었던 세계화와 자유무역, 다자주의의 힘이 이제는 불평등과 정치적 반발, 보호주의를 키우며 새로운 불안의 원인이 되고 있다.

* 미국이 주도한 전후 경제질서는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지만, 중국과 인도, 중견국의 부상으로 더 이상 예전처럼 세계경제를 하나의 규칙 아래 묶어두기 어려워졌다.

* 세계화의 문제는 개방 자체가 아니라, 그 이익을 공정하게 나누고 피해를 흡수할 국내 사회계약과 제도적 장치가 충분히 작동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 미국과 중국의 경쟁은 단순한 무역 갈등이 아니라 기술, 금융, 공급망, 안보, 국제규칙을 둘러싼 권력 경쟁이며, 이 경쟁이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을 더욱 키우고 있다.

* 무질서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과거 세계화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회복력과 공정성, 대표성, 신뢰를 갖춘 새로운 국제경제 규칙과 제도 개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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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만든 세계경제 질서, 더 이상 예전처럼 작동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는 미국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달러는 국제 금융의 중심 통화가 되었고, 미국 시장은 세계 기업들이 진입하고 싶어 하는 가장 큰 소비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이후의 세계무역기구는 전후 세계경제를 떠받치는 제도적 기둥이 되었다. 냉전이 끝난 뒤에는 이 질서가 더 넓은 세계로 확장될 것이라는 기대가 커졌다. 자유무역, 자본 이동, 개방경제, 다자주의, 규칙 기반 질서가 세계경제의 공통 언어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 질서는 처음부터 완벽하게 중립적이거나 보편적인 체제는 아니었다. 미국의 경제력, 군사력, 금융력, 기술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질서였다. 미국이 압도적인 생산력과 소비력, 금융 신뢰를 유지하던 시기에는 세계경제의 갈등도 일정한 틀 안에서 조정될 수 있었다. 달러 중심 질서는 위기 때마다 안전판처럼 작동했고, 미국 시장은 수출국들의 성장을 흡수하는 공간이 되었으며,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은 국제기구의 방향을 결정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문제는 세계경제의 무게중심이 이동하면서도 제도의 작동 방식은 과거의 구조에 많이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중국은 세계 제조업과 무역의 핵심 축으로 올라섰고, 인도는 인구와 성장 잠재력, 디지털 산업을 바탕으로 새로운 경제 강국으로 부상했다. 동남아시아, 브라질, 인도네시아, 사우디아라비아, 남아공 같은 국가들도 더 이상 주변부에 머물지 않는다. 세계 국내총생산에서 서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들고, 비서구 경제권의 발언권은 커졌다.

그럼에도 세계경제를 관리하는 규칙과 제도는 이 변화를 충분히 흡수하지 못했다. 신흥 경제권은 더 큰 대표성과 발언권을 요구하지만, 기존 강대국은 자신들이 만든 규칙과 영향력을 쉽게 내려놓지 않는다. 미국은 규칙 기반 질서를 강조하면서도 자국 이익이 걸린 문제에서는 예외를 요구하고, 중국은 기존 질서의 혜택을 활용하면서도 자신에게 불리한 규칙에는 도전한다. 국제기구는 양쪽의 압박 사이에서 조정 능력을 잃어간다.

이때 세계경제는 하나의 안정된 중심을 잃는다. 과거에는 미국의 압도적 힘이 질서의 중심을 잡아주었다면, 지금은 미국의 힘은 여전히 크지만 절대적이지 않고, 중국의 힘은 커졌지만 신뢰받는 대안 질서를 만들 만큼 보편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인도와 중견국들은 부상하고 있지만 아직 세계질서를 하나로 묶을 제도적 리더십을 제공하기 어렵다. 세계는 단극 질서에서 다극 질서로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낡은 중심이 약해지고 새로운 중심은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중간지대에 놓여 있다.

이 중간지대에서 무질서의 고리가 만들어진다. 규칙은 남아 있지만 충분히 존중받지 못하고, 제도는 존재하지만 갈등을 해결할 힘이 약해진다. 각국은 협력의 이익을 알면서도 상대가 규칙을 이용해 자신을 압박할지 모른다고 의심한다. 세계경제의 위기는 단순히 성장률이 낮아지는 문제가 아니다. 누가 규칙을 만들고, 누가 비용을 부담하며, 누가 위기의 책임을 질 것인가를 둘러싼 신뢰의 붕괴다.

세계화의 성공은 왜 정치적 반발로 되돌아왔나
세계화는 분명히 많은 것을 바꾸었다. 상품은 더 싸졌고, 기업은 더 넓은 시장을 얻었으며, 수많은 개발도상국은 수출과 투자를 통해 성장의 기회를 잡았다. 중국의 급속한 산업화, 인도의 서비스 산업 성장, 동남아시아의 제조업 확대, 동유럽의 생산기지화는 모두 세계화가 만들어낸 변화였다. 세계경제에 편입된 국가들은 도시화와 중산층 확대를 경험했고, 글로벌 기업은 복잡한 공급망을 통해 비용을 낮추고 생산성을 높였다.

하지만 세계화의 성과는 고르게 나뉘지 않았다. 어느 국가 안에서는 대도시와 금융·기술 산업이 빠르게 성장한 반면, 제조업 지역과 저숙련 노동자는 일자리 불안에 놓였다. 선진국의 노동자는 공장이 해외로 이전되는 현실을 겪었고, 중산층의 생활 안정성은 약해졌다. 기업의 이익과 자산가격은 빠르게 커졌지만, 임금과 지역경제는 그만큼 따라가지 못했다. 세계화가 국가 전체의 부를 늘렸다고 해도, 그 안에서 누가 이익을 얻고 누가 비용을 떠안았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정치적 반발은 바로 이 틈에서 자라났다. 자유무역과 개방경제의 장점을 설명하는 말은 많았지만,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와 쇠퇴한 지역 공동체에 돌아간 보상은 충분하지 않았다. 경제학적으로는 전체 후생이 늘어났다고 설명할 수 있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특정 계층과 지역이 지속적으로 밀려나는 경험이 누적되었다. 세계화의 비용을 조정해야 할 국내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경제적 불만은 점점 제도와 엘리트에 대한 불신으로 바뀌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이 불신을 폭발시킨 사건이었다. 금융시스템의 과도한 위험 추구가 전 세계를 위기로 몰아넣었고, 그 피해는 평범한 가계와 노동자에게 크게 돌아갔다. 위기를 만든 금융기관은 구제받았지만, 많은 시민은 실업과 부채, 주거 불안을 감당해야 했다. 이후 자산시장은 빠르게 회복되었지만, 생활의 안정성은 같은 속도로 회복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세계경제의 규칙이 누구를 보호하는지 묻기 시작했다.

이후 세계화는 번영의 약속이 아니라 불안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자유무역은 일자리 상실의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이민은 임금과 문화적 정체성을 위협하는 문제로 정치화되었으며, 국제기구는 국민의 삶보다 글로벌 엘리트의 이해를 대변하는 존재로 공격받았다. 무역전쟁, 관세 인상, 자국 우선주의, 반이민 정치, 산업 보조금 경쟁은 모두 이 불신의 정치적 표현이었다.

중요한 점은 세계화의 실패가 단순히 세계화 자체의 실패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세계화는 성장의 기회를 만들었지만, 그 이익을 공정하게 나누고 충격을 흡수할 사회적 장치를 충분히 만들지 못했다. 노동자의 재교육, 지역 산업 전환, 사회안전망, 세제 개혁, 공정 경쟁 규칙이 함께 작동했다면 반발은 지금처럼 커지지 않았을 수 있다. 결국 세계화의 위기는 개방경제와 국내 사회계약 사이의 균형이 무너진 결과다.

이 균형 붕괴는 다시 국제질서를 흔든다. 국내 정치에서 세계화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 정부는 보호주의와 자국 우선주의를 선택하기 쉬워진다. 보호주의는 상대국의 보복을 부르고, 보복은 무역 갈등을 키우며, 무역 갈등은 공급망 불안을 높인다. 공급망 불안은 물가를 자극하고, 물가 상승은 시민의 생활 불만을 키운다. 생활 불만은 다시 세계화와 국제협력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진다. 세계경제의 둠 루프는 이렇게 국내 정치와 국제경제가 서로를 악화시키는 구조에서 작동한다.

중국과 인도의 부상, 다극화는 왜 안정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중국의 부상은 세계경제 질서의 가장 큰 변화였다. 중국은 값싼 노동력과 거대한 내수시장, 국가 주도의 산업정책, 글로벌 공급망 편입을 통해 세계 제조업의 중심으로 올라섰다. 한때 많은 국가는 중국이 세계경제에 깊이 편입될수록 기존 규칙에 더 가까워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무역과 투자가 중국을 시장경제와 국제규범 쪽으로 끌어당길 것이라는 낙관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더 복잡했다. 중국은 세계화의 혜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도, 국가 주도의 경제 운영과 산업정책, 기술 자립 전략을 유지했다. 국유기업, 보조금, 시장 접근 제한, 기술 이전 압박, 데이터 통제, 금융관리 등은 기존 자유주의 경제질서와 계속 충돌했다. 중국의 성장은 세계경제에 막대한 수요와 공급 능력을 제공했지만, 동시에 기존 강대국과 산업 경쟁국에는 깊은 불안감을 안겼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은 그래서 단순한 무역 분쟁이 아니다. 관세 갈등은 시작에 불과했고, 경쟁은 반도체, 인공지능, 통신망, 배터리, 희토류, 우주, 금융, 군사 기술로 확대되었다. 미국은 중국의 기술 굴기를 전략적 위협으로 인식하고, 중국은 미국의 제재와 수출 통제를 자국의 부상을 막으려는 봉쇄로 받아들인다. 서로의 의도를 최악으로 해석하는 순간, 상호의존은 평화의 기반이 아니라 취약성의 통로가 된다.

인도의 부상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인도는 거대한 인구, 젊은 노동력, 디지털 인프라, 서비스 산업, 지정학적 위치를 바탕으로 세계경제에서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중국을 대체하거나 보완할 생산기지로 주목받고, 미국과 서방에는 중국 견제의 파트너로 여겨지며, 글로벌 사우스에서는 독자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대표 국가로 부상하고 있다. 하지만 인도의 부상도 곧바로 안정된 다극질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인도는 미국과 협력하지만 완전히 미국 편에 서지는 않는다. 중국과 경쟁하지만 모든 영역에서 단절을 원하지도 않는다. 러시아와의 관계, 에너지 수입, 국방 협력, 글로벌 사우스 리더십, 자국 산업 보호 정책은 인도가 독자적 전략 공간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인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브라질, 인도네시아, 사우디아라비아, 튀르키예, 남아공 같은 중견국들도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이들은 어느 한 진영의 하위 파트너가 아니라, 강대국 경쟁을 활용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한다.

겉으로 보면 다극화는 더 균형 잡힌 질서처럼 보일 수 있다. 하나의 초강대국이 모든 것을 좌우하지 않고, 여러 국가가 힘을 나누면 더 공정한 세계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가능하다. 그러나 다극화가 자동으로 안정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힘의 중심이 많아질수록 조정은 더 어려워지고, 규칙에 대한 합의는 더 복잡해진다. 각국이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정치체제를 가지고 움직이면, 하나의 공통 규범을 만들기가 더 힘들어진다.

중견국의 딜레마도 여기서 생긴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심해질수록 중견국들은 선택을 강요받는다. 기술 표준은 어느 쪽을 따를 것인가, 반도체 공급망은 어디에 연결할 것인가, 군사 안보는 누구와 협력할 것인가, 에너지와 원자재는 어디에서 조달할 것인가, 데이터와 디지털 규제는 어떤 체계를 택할 것인가. 한쪽 선택은 다른 쪽 시장과 관계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

한국 역시 이 딜레마 한가운데에 있다. 안보는 미국과 깊이 연결되어 있고, 경제는 중국과 오랫동안 얽혀왔다. 반도체, 배터리, 자동차, 조선, 디스플레이, 방산 같은 핵심 산업은 글로벌 공급망 위에서 움직인다. 단순히 어느 한쪽에 서는 방식도, 계속 모호하게 버티는 방식도 충분하지 않다. 원칙 있는 유연성, 공급망 다변화, 핵심 기술 확보, 중견국 연대, 국내 산업 전환이 동시에 필요하다.

세계경제의 무질서는 강대국의 충돌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부상하는 국가들이 더 큰 목소리를 내고, 기존 강대국이 영향력을 지키려 하며, 중견국들이 선택을 미루거나 조정하려는 과정 전체에서 발생한다. 새로운 힘의 분포가 새로운 규칙으로 정리되지 못할 때, 다극화는 안정이 아니라 불확실성으로 나타난다.

경쟁은 시장을 효율적으로 만들지만, 세계질서를 안정시키지는 못한다
시장경제에서 경쟁은 중요한 원리다. 기업들이 경쟁하면 더 좋은 상품과 서비스가 나오고, 가격은 낮아지며, 혁신은 빨라진다. 소비자는 더 많은 선택지를 얻고, 비효율적인 기업은 도태된다. 그래서 경쟁은 효율과 생산성을 높이는 힘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 논리를 국제정치와 세계경제 질서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기업 간 경쟁은 규칙을 집행하는 제도와 법질서 안에서 이루어진다. 반면 강대국 간 경쟁은 그 규칙 자체를 둘러싸고 벌어진다. 어느 나라가 표준을 정할 것인가, 어느 통화가 국제 결제의 중심이 될 것인가, 어떤 기술을 수출할 수 있고 어떤 기술은 차단할 것인가, 제재와 보조금은 어디까지 허용될 것인가가 경쟁의 대상이 된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위험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두 경제대국은 서로에게 깊이 의존하면서도 서로를 전략적 위협으로 본다. 미국은 중국의 산업정책과 기술 추격을 경계하고, 중국은 미국의 수출 통제와 금융 제재를 패권 유지 전략으로 해석한다. 상대를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 협력 가능한 영역마저 안보의 문제로 바뀐다. 경제적 상호의존이 갈등을 완화하기보다 갈등의 무기가 되는 것이다.

반도체가 대표적이다. 반도체는 스마트폰과 자동차, 데이터센터, 인공지능, 군사 장비, 위성 시스템까지 연결하는 핵심 기술이다. 과거에는 글로벌 분업을 통해 가장 효율적인 생산체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이제는 누가 설계 기술을 갖고 있는지, 누가 첨단 장비를 통제하는지, 어느 나라가 생산시설을 보유하는지가 안보의 문제가 되었다. 효율적 공급망은 전략적 취약성으로 재해석되었다.

금융도 마찬가지다. 달러 중심 금융질서는 세계경제에 유동성과 안정성을 제공했지만, 동시에 미국의 제재 권한을 강화했다. 미국이 금융망 접근을 제한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다른 국가들에게 달러 의존의 위험을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달러를 대체할 신뢰도 높은 국제통화 체계는 아직 없다. 기존 질서에 대한 불만은 커지지만, 대안 질서는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다. 이 공백이 불안을 키운다.

기술 표준과 데이터 규칙에서도 경쟁은 안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서로 다른 디지털 규제, 인공지능 윤리 기준, 데이터 이전 규칙, 사이버 보안 체계가 만들어지면 기업과 국가는 복잡한 선택을 해야 한다. 표준이 나뉘면 혁신 비용은 높아지고, 국제 협력은 줄어든다. 기술 경쟁이 혁신을 촉진할 수도 있지만, 불신 속에서 진행되는 기술 경쟁은 지식 교류와 공동 연구, 인재 이동을 막아 장기적 생산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

세계경제에서 필요한 경쟁은 규칙 있는 경쟁이다. 그러나 지금의 경쟁은 점점 규칙을 흔드는 경쟁으로 변하고 있다. 각국은 자국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보조금을 늘리고, 상대국 기술을 견제하기 위해 수출 통제를 확대하며, 공급망을 자국 또는 우방국 중심으로 재편하려 한다. 이런 조치는 단기적으로는 안전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세계경제의 비용을 높이고 갈등을 구조화한다.

경쟁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경쟁을 관리할 제도와 신뢰가 약해진 것이 문제다. 규칙이 분명하고 분쟁 해결 절차가 작동한다면 경쟁은 혁신과 효율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규칙이 흔들리고 각국이 상대의 의도를 불신하면 경쟁은 보복과 차단의 연쇄로 바뀐다. 세계경제의 둠 루프는 시장 경쟁이 아니라, 규칙 없는 권력 경쟁에서 더 빠르게 회전한다.

IMF와 WTO, 낡은 제도는 새 질서를 감당하지 못한다
국제경제 질서를 관리하는 대표적 제도는 오랫동안 국제통화기금과 세계무역기구였다. 국제통화기금은 금융위기와 외환위기에 대응하는 안전망 역할을 맡았고, 세계무역기구는 무역 규칙과 분쟁 해결의 중심으로 기능했다. 두 제도는 전후 세계경제의 확장과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21세기 세계경제의 현실은 이 제도들이 만들어졌던 시대와 크게 달라졌다.

국제통화기금은 위기 국가에 자금을 지원하고 구조조정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많은 개발도상국은 이 과정에서 과도한 긴축과 사회적 고통을 경험했다고 느낀다. 위기의 책임이 국내 정책 실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금리, 달러 강세, 원자재 가격, 기후재난, 지정학 충격과 연결되어 있을 때, 전통적인 처방은 충분하지 않다. 식량과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고, 외화부채 부담이 커지고, 기후위기로 재정 지출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단순 긴축은 정치적 불안을 키울 수 있다.

세계무역기구의 어려움도 깊다. 자유무역의 확대를 전제로 설계된 규칙은 국가안보, 산업 보조금, 디지털 무역, 데이터 이동, 기후 규제, 공급망 재편 같은 새로운 쟁점을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 분쟁 해결 기능이 약해지면 각국은 다자 규칙보다 힘의 논리에 의존하게 된다. 강대국은 관세와 제재, 수출 통제, 보조금을 전략 도구로 사용하고, 약한 국가는 선택의 폭을 잃는다.

무역질서의 변화는 단순히 관세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이제 무역은 산업정책, 기술안보, 노동 기준, 탄소 배출, 데이터 주권과 연결된다. 배터리 하나를 생산해도 원자재 채굴, 전력 생산 방식, 노동 조건, 보조금, 시장 접근 규칙이 모두 문제가 된다. 낡은 무역 규칙만으로는 이런 복합적 쟁점을 해결하기 어렵다.

국제기구가 약해진 또 다른 이유는 대표성의 문제다. 신흥 경제권은 자신들의 경제적 비중이 커진 만큼 의사결정 구조에서도 더 큰 권한을 요구한다. 하지만 기존 선진국 중심의 구조는 빠르게 바뀌지 않는다. 대표성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는 국가는 제도에 대한 신뢰를 잃고, 신뢰가 약해진 제도는 위기 때 조정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각국은 대체 경로를 찾는다. 지역 협정, 양자 협정, 우방국 중심 공급망, 통화 스와프, 개발금융 경쟁, 새로운 다자 협의체가 늘어난다. 이는 기존 제도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지만, 동시에 세계경제 규칙을 더 복잡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나의 공통 질서가 아니라 여러 규칙과 블록이 겹치는 구조가 되면 기업과 국가는 더 큰 불확실성에 놓인다.

국제기구의 약화는 세계경제의 둠 루프를 더 강하게 만든다. 금융위기가 발생해도 신뢰받는 조정자가 부족하고, 무역분쟁이 커져도 판정과 집행이 어렵다. 기후위기와 부채위기처럼 국경을 넘는 문제는 더 많은 협력을 필요로 하지만, 정작 협력의 제도적 기반은 약해진다. 위기는 제도의 약점을 드러내고, 제도의 약점은 위기를 더 키운다.

새로운 해법은 과거 질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세계경제의 혼란을 보며 과거의 안정된 세계화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길은 현실적이지 않다. 과거의 세계화는 많은 성과를 냈지만, 동시에 불평등, 지역 쇠퇴, 금융 불안, 정치적 반발을 충분히 해결하지 못했다. 미국이 압도적 힘으로 질서를 관리하던 시절로 되돌아가기도 어렵다. 중국과 인도, 중견국의 부상은 이미 세계경제의 구조를 바꾸어놓았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복귀가 아니라 재설계다. 세계경제는 개방의 이익을 유지하되, 취약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공급망은 지나치게 한 곳에 집중되지 않도록 다변화되어야 하지만, 완전한 단절로 가서는 안 된다. 핵심 기술은 안보 차원에서 관리해야 하지만, 모든 기술 교류를 봉쇄해서는 안 된다. 금융 안정성은 강화해야 하지만, 개발도상국의 성장 기회를 막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국제경제 규칙은 세계화의 비용을 더 정직하게 다루어야 한다. 자유무역의 이익만 강조하고 피해를 본 노동자와 지역을 방치하는 방식은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렵다. 개방경제가 정치적 지지를 얻으려면 국내 사회안전망, 직업 전환 교육, 지역 재생, 공정한 조세, 독점 규제와 함께 작동해야 한다. 국제질서는 국내 사회계약과 분리될 수 없다. 시민이 세계화를 자신의 삶을 위협하는 힘으로 느끼면 어떤 국제협력도 오래가기 어렵다.

부채 문제도 새롭게 접근해야 한다. 많은 개발도상국은 팬데믹, 고금리, 달러 강세, 식량·에너지 가격 상승, 기후재난이 겹치며 복합 위기에 놓여 있다. 단순히 긴축을 요구하는 방식으로는 위기를 해결하기 어렵다. 채무 조정, 기후 금융, 개발 투자, 사회 보호를 결합한 더 현실적인 해법이 필요하다. 부채 위기를 방치하면 경제 문제는 곧 정치 불안과 이주, 갈등, 안보 문제로 번진다.

무역 규칙도 20세기식 자유무역 논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국가안보를 이유로 한 예외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지, 산업 보조금은 어떤 기준으로 허용할 것인지, 탄소 감축과 무역 규칙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디지털 무역과 데이터 이동은 어떤 원칙으로 관리할 것인지에 대한 새로운 합의가 필요하다. 모든 국가가 완전히 같은 규칙을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최소한의 공통 기준이 없으면 세계경제는 계속 힘의 논리로 기울어진다.

강대국 경쟁을 관리하는 장치도 필요하다. 미국과 중국이 모든 영역에서 신뢰를 회복하기는 어렵지만, 금융 안정, 기후변화, 보건, 식량, 핵심 공급망, 인공지능 안전 같은 영역에서는 최소한의 협력 채널을 유지해야 한다. 완전한 협력이 불가능하더라도 완전한 단절은 더 위험하다. 갈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갈등이 전체 질서를 파괴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규칙이 필요하다.

중견국의 역할도 커져야 한다. 인도, 브라질, 인도네시아, 한국, 일본, 호주, 유럽 국가들은 강대국 경쟁의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규칙을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는 주체다. 중견국들이 공급망, 디지털 규칙, 기후 금융, 개발 협력, 보건 안보에서 실용적 연대를 만들면 세계경제는 양극 대결만으로 흘러가지 않을 수 있다. 다자주의가 약해진 시대일수록 더 작고 유연한 협력의 조합이 중요해진다.

둠 루프를 끊는 힘은 신뢰와 제도 개혁이다
세계경제의 둠 루프는 하나의 위기가 다른 위기를 부르는 구조다. 세계화의 불평등은 국내 정치의 반발을 낳고, 정치적 반발은 보호주의를 키우며, 보호주의는 무역 갈등과 공급망 불안을 만든다. 강대국 경쟁은 기술과 금융을 무기화하고, 기술과 금융의 무기화는 상대국의 불신을 더 키운다. 국제기구가 약해질수록 위기는 조정되지 못하고, 조정되지 못한 위기는 다시 제도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다.

이 고리를 끊으려면 먼저 위기의 연결 구조를 정확히 보아야 한다. 무역 문제를 무역만으로, 금융 문제를 금융만으로, 기술 문제를 기술만으로, 국내 정치 문제를 국내 정치만으로 볼 수 없다. 세계경제의 불안은 경제, 정치, 지정학이 서로 맞물린 결과다. 하나의 처방으로 해결될 수 없고, 한 나라의 선택만으로 안정될 수도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의 회복이다. 신뢰는 선언으로 생기지 않는다. 예측 가능한 규칙, 공정한 부담 분담, 위기 때 작동하는 제도, 국내 시민을 설득할 수 있는 정치가 함께 있어야 한다. 강대국은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 규칙을 강조해서는 안 되고, 신흥 경제권은 더 큰 권한과 함께 더 큰 책임도 받아들여야 한다. 국제기구는 대표성과 실효성을 동시에 높여야 한다.

세계경제 질서의 회복은 과거의 세계화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효율만을 앞세운 세계화에서 회복력과 공정성을 함께 고려하는 세계화로 이동하는 일이다. 시장의 힘을 활용하되 사회적 비용을 방치하지 않고, 경쟁을 인정하되 규칙 없는 보복 경쟁으로 흐르지 않게 하며, 국가안보의 필요성을 받아들이되 모든 경제관계를 안보화하지 않는 균형이 필요하다.

한국 같은 개방형 경제는 이 변화의 의미를 더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세계질서가 흔들릴수록 수출, 금융, 환율, 에너지, 원자재, 기술 공급망이 동시에 영향을 받는다. 국내 산업을 지키는 일과 국제협력을 넓히는 일은 서로 반대가 아니다. 핵심 기술을 강화하면서도 시장을 다변화하고, 안보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중견국 협력의 폭을 넓히며, 산업 전환의 비용을 사회 전체가 감당할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무질서의 시대를 통과하는 데 필요한 능력은 더 높은 장벽을 쌓는 기술이 아니다. 장벽은 때로 필요하지만, 장벽만으로는 세계경제를 안정시킬 수 없다. 진짜 필요한 것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국가들이 최소한의 규칙을 다시 만들고, 국내 시민들이 그 규칙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공정한 사회계약을 세우는 일이다.

세계경제는 저절로 무너지지 않는다. 방치할 때 무너진다. 반대로 저절로 회복되지도 않는다. 다시 설계하고, 조정하고, 설득하고, 책임을 나누는 과정이 필요하다. 둠 루프의 시대는 비관의 언어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이 위기를 반복시키는지 정확히 보고, 그 고리를 끊을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라고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