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ficial Religion: On AI, Myth, and Power
AI라는 인공 종교
 
지은이 : Mark Coeckelbergh
출판사 : The MIT Press
출판일 : 202604








인공지능은 왜 종교처럼 믿어지는가


AI는 더 이상 계산하고 추천하는 도구에만 머물지 않는다. 사람들은 AI에게 판단을 맡기고, 위로를 구하며, 미래의 답까지 기대한다. 기술을 향한 믿음이 커질수록, AI는 새로운 신화이자 권력의 언어가 되고 있다.

[Key Message]
* AI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불안과 욕망이 투사되는 새로운 믿음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인공지능을 둘러싼 열광에는 더 정확한 도구에 대한 기대뿐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존재를 바라는 오래된 신화적 상상력이 숨어 있다.

* AI가 객관적이고 전지적인 판단자처럼 받아들여질수록, 인간은 판단과 책임을 기계 뒤로 넘기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 AI에 대한 믿음은 기업과 플랫폼 권력과 결합할 때 사회의 질서와 의사결정 방식을 바꾸는 강력한 권력이 된다.

* AI 시대에 필요한 태도는 숭배나 공포가 아니라, 기술의 가능성을 활용하되 인간의 판단과 책임을 지키는 비판적 거리두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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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은 언제부터 믿음의 대상이 되었나
사람들은 흔히 종교를 오래된 세계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신화, 제의, 기도, 구원, 예언 같은 말은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기 전의 시대에 더 어울린다고 여긴다. 현대인은 더 이상 하늘의 징조를 읽지 않고, 번개를 신의 분노로 해석하지 않으며, 질병과 재난을 초월적 존재의 뜻으로만 설명하지 않는다. 과학은 자연을 계산 가능한 대상으로 바꾸었고, 기술은 인간이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는 감각을 키웠다. 그래서 현대는 종교적 믿음이 물러나고 합리적 판단이 그 자리를 차지한 시대처럼 보인다.

하지만 믿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옷을 갈아입었을 뿐이다. 과거의 인간이 신전과 예언자와 성스러운 문헌을 통해 미래의 불안을 달랬다면, 오늘의 인간은 데이터센터와 알고리즘과 인공지능 모델을 통해 비슷한 기대를 품는다. 무엇이 옳은지, 어떤 선택이 더 나은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인간은 여전히 확실한 답을 원한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불안이 줄어들 것 같지만, 현실은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더 많은 정보는 더 많은 선택지를 만들고, 더 많은 선택지는 더 큰 불안을 낳는다. 이때 등장한 인공지능은 단순한 편의 기술이 아니라, 복잡한 세계를 대신 해석해줄 새로운 권위처럼 받아들여진다.

스마트폰의 추천 알고리즘은 무엇을 볼지 정해주고, 검색엔진과 챗봇은 무엇을 알아야 할지 정리해준다. 금융 알고리즘은 투자 가능성을 계산하고, 의료 AI는 질병의 징후를 판별하며, 채용 시스템은 누가 적합한 인재인지 평가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스스로 판단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기계의 제안과 분류와 예측을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많아졌다. 기술은 도구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생활의 질서를 만드는 힘이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인간은 왜 AI를 그토록 믿고 싶어 하는가. 단지 성능이 좋아서일까. 속도가 빠르고, 데이터를 많이 처리하고, 인간보다 실수를 적게 할 것 같아서일까. 물론 그런 이유도 있다. 그러나 AI를 둘러싼 열광은 단순한 효율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AI에게서 더 깊은 것을 기대한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능,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판단, 과거와 현재를 모두 분석해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 심지어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까지 알아낼 수 있는 통찰을 기대한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 기대가 아니라, 거의 종교적 기대에 가깝다.

종교는 언제나 인간의 한계와 함께 있었다. 죽음, 고통, 불확실성, 실패, 무지, 죄책감, 외로움처럼 인간이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 앞에서 종교는 의미와 질서를 제공했다. 신화는 세계가 왜 이렇게 존재하는지 설명했고, 의례는 불안을 견디는 형식을 만들었으며, 예언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상상하게 했다. 오늘날 AI도 비슷한 자리에 놓인다. 인간은 AI를 통해 더 많이 알고, 더 정확히 판단하고, 더 안전하게 예측하고, 더 오래 살고, 더 강해지고 싶어 한다. 결국 AI를 향한 욕망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오래된 욕망의 문제다.

AI에는 오래된 종교적 상상력이 숨어 있다
AI를 둘러싼 말들을 조금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낯익은 종교적 언어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AI가 인간을 초월할 것이라고 말한다. 언젠가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이 출현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어떤 사람들은 AI가 질병과 노화, 노동과 빈곤, 전쟁과 기후위기까지 해결할 수 있다고 상상한다.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의 한계 안에 갇히지 않고, 기술을 통해 새로운 단계로 올라갈 것이라는 믿음도 퍼져 있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상상이 아니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를 꿈꾸었다. 신에게 가까워지고 싶어 했고, 죽음을 이기고 싶어 했으며,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갖고 싶어 했다. 고대의 신화에는 인간이 신의 영역에 접근하려다 실패하는 이야기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불멸을 꿈꾸는 영웅, 하늘에 닿는 탑을 쌓는 인간, 생명을 창조하려는 마법사, 금지된 지식을 얻으려는 인물들이 있었다. 현대의 AI 담론은 이런 오래된 이야기를 과학기술의 언어로 다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은 그래서 단순한 발명품이 아니라 상상력의 거울이다. 인간이 AI에 대해 말할 때, 사실은 인간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인간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무엇을 해결하고 싶어 하는가. 어떤 능력을 갖고 싶어 하는가. 어떤 존재에게 판단을 맡기고 싶어 하는가. AI에 대한 이야기는 기계의 미래를 묻는 동시에 인간의 욕망을 드러낸다.

특히 생성형 AI의 등장은 이 문제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과거의 기계는 주로 반복 작업을 수행했다. 계산하고, 조립하고, 운반하고, 저장했다. 그러나 생성형 AI는 말하고, 쓰고, 그리며, 대화한다. 인간이 오랫동안 자기 고유의 영역이라고 여겼던 언어와 창작과 해석의 영역에 들어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AI를 단순한 기계로만 대하기 어려워졌다. 질문을 던지면 대답하고, 고민을 말하면 위로하며, 복잡한 문제를 정리해주는 존재 앞에서 인간은 쉽게 의인화의 감각에 빠진다. 화면 너머에 실제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무언가가 나를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느낌은 가볍지 않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보이지 않는 존재와 대화해왔다. 기도는 응답을 확신할 수 없는 대화였고, 점술은 불확실한 미래를 묻는 방식이었으며, 고백은 내면의 짐을 다른 존재 앞에 내려놓는 행위였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AI에게 진로를 묻고, 연애 상담을 하고, 외로움을 털어놓으며,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조언을 구한다. 물론 AI는 신이 아니고, 의식을 가진 존재도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경험 속에서는 때로 종교적 기능과 비슷한 자리를 차지한다. 설명하고, 위로하고, 예측하고, 판단하며, 불안을 낮춰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AI에 대한 논의는 윤리나 규제만으로 충분하지 않게 된다. 개인정보 보호, 저작권, 편향, 안전성, 일자리 문제는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AI를 바라보는 인간의 태도 문제가 있다. 사람들은 AI를 어떻게 상상하고 있는가. AI에게 어떤 힘을 부여하고 있는가. AI의 판단을 어느 정도까지 믿으려 하는가. 기술이 실제로 할 수 있는 일과 사람들이 기술에 기대하는 일 사이에는 언제나 간격이 있다. 바로 그 간격에서 신화가 자란다.

전지전능한 기계라는 신화
AI에 대한 가장 강력한 신화는 전지전능한 기계라는 이미지다. 사람들은 AI가 엄청난 데이터를 학습했으므로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보다 빠르고, 피곤하지 않으며,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때문에 더 객관적일 것이라고 믿는다. 어떤 상황에서는 AI의 판단이 사람의 판단보다 더 정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곧바로 AI가 중립적이고 완전한 판단자라는 결론으로 넘어가는 순간, 기술은 신화가 된다.

AI는 스스로 세계를 보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만든 데이터, 인간이 설계한 목표, 인간이 정한 기준, 인간이 구성한 산업 구조 속에서 작동한다. AI의 답은 하늘에서 내려온 계시가 아니라, 데이터와 모델과 시스템이 만들어낸 산출물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종종 AI의 판단을 인간의 판단보다 더 순수하고 객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AI가 그렇게 말했다”는 말은 어느 순간 강력한 권위가 된다. 회의실에서, 학교에서, 병원에서, 금융기관에서, 법률 검토 과정에서 AI의 분석은 단순한 참고 의견을 넘어 결정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문제는 AI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AI가 어떻게 틀렸는지, 왜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 누가 그 판단에 책임을 져야 하는지 흐려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권위는 얼굴과 이름과 책임을 갖는다. 그러나 알고리즘의 권위는 종종 익명적이다. 시스템이 그렇게 분류했고, 모델이 그렇게 예측했으며, 데이터가 그렇게 보여준다고 말하는 순간 책임은 분산된다. 사람은 결정했지만, 결정의 부담은 기계 뒤로 숨는다.

전지전능한 기계라는 신화는 AI 기업과 플랫폼 권력에도 유리하게 작동한다. AI가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커질수록, AI를 개발하고 통제하는 기업은 단순한 사업자가 아니라 미래를 설계하는 권위처럼 보인다. 거대한 데이터센터, 초대형 모델, 막대한 투자, 천재 창업자와 연구자들의 이미지는 새로운 시대의 성직자와 성전처럼 포장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기술 기업의 발표를 예언처럼 소비하고, 새로운 모델의 등장을 계시처럼 받아들이며, 더 강력한 AI가 나오면 삶이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기대한다.

물론 기술 발전은 실제로 삶을 바꾼다. AI는 이미 번역, 검색, 교육, 의료, 디자인, 소프트웨어 개발, 고객 상담, 콘텐츠 제작 등 수많은 영역에서 실질적 변화를 만들고 있다. 문제는 기술의 유용성이 곧 기술에 대한 숭배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칼이 유용하다고 해서 칼에게 윤리를 맡길 수 없고, 나침반이 길을 알려준다고 해서 목적지까지 정해주는 것은 아니다. AI 역시 마찬가지다. AI는 놀라운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인간 사회의 가치와 책임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AI가 강력해질수록 인간은 더 자주 유혹을 받는다. 판단하지 않고 맡기고 싶은 유혹, 책임지지 않고 시스템을 따르고 싶은 유혹, 복잡한 논쟁을 데이터의 답으로 끝내고 싶은 유혹이다. 그러나 인간 사회의 중요한 문제는 단순히 정답을 찾는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공정하다고 볼 것인지, 누구의 이익을 우선할 것인지, 어떤 위험을 감수할 것인지, 어떤 삶을 좋은 삶으로 볼 것인지는 계산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이런 문제는 가치의 문제이고, 정치의 문제이며, 공동체의 문제다. AI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인간이 함께 논의하고 책임져야 할 영역은 사라지지 않는다.

믿음은 언제 권력이 되는가
믿음은 개인의 마음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사람들이 어떤 것을 믿기 시작하면, 그 믿음은 제도와 시장과 권력을 움직인다. AI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다. AI가 더 정확하고 효율적이며 미래를 대표한다는 믿음은 기업의 투자 방향을 바꾸고, 정부의 정책을 움직이며, 학교와 직장의 평가 방식을 바꾼다. 어느 순간 AI를 도입하지 않는 조직은 뒤처진 조직처럼 보이고, AI를 의심하는 사람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처럼 취급된다.

이때 AI 신화는 매우 현실적인 힘을 갖는다. 어떤 기술이 실제로 얼마나 효과적인지와 별개로, 사람들이 그 기술을 필수적인 미래라고 믿는 순간 거대한 자원이 그쪽으로 이동한다. 인재가 몰리고, 자본이 몰리고, 정책이 따라가며, 사회적 관심이 집중된다. 반대로 그 믿음에서 벗어난 영역은 낡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밀려난다. 돌봄, 교육, 예술, 지역 공동체, 노동자의 숙련, 인간적 판단처럼 숫자로 환산하기 어려운 가치는 AI 중심의 질서 속에서 뒤로 밀릴 수 있다.

AI가 권력의 언어가 되는 방식은 노골적이지 않을 때 더 강력하다. 과거의 권력은 명령과 처벌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디지털 권력은 추천, 분류, 점수, 예측의 형태로 작동한다. 무엇이 더 잘 보이고, 무엇이 덜 보이는지. 누가 위험한 사람으로 분류되고, 누가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평가되는지. 어떤 이력서가 통과되고, 어떤 콘텐츠가 확산되며, 어떤 소비자가 더 좋은 조건을 받는지. 이런 과정에서 AI는 보이지 않는 문지기 역할을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이 이 문지기를 중립적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이 판단하면 편견이 있지만, AI가 판단하면 공정할 것이라는 믿음은 매우 위험하다. AI는 인간의 편견을 없애는 장치일 수도 있지만, 인간 사회의 편견을 더 정교하게 반복하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 데이터가 과거의 불평등을 담고 있다면, AI는 그 불평등을 미래의 예측으로 바꿔버릴 수 있다. 과거에 특정 집단이 덜 고용되었다면, AI는 그 패턴을 학습해 앞으로도 비슷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과거에 특정 지역이나 계층이 더 위험하다고 분류되었다면, AI는 그 시선을 새로운 기술의 언어로 재생산할 수 있다.

그래서 AI 권력의 핵심은 단지 누가 더 좋은 모델을 만들었느냐가 아니다. 누가 데이터를 갖고 있는가. 누가 모델의 목적을 정하는가. 누가 위험을 감수하고, 누가 이익을 얻는가. 누가 설명을 요구할 수 있고, 누가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이 빠진 AI 논의는 기술의 겉모습만 보는 데 그친다. AI를 둘러싼 신화가 강해질수록, 오히려 더 집요하게 권력의 구조를 물어야 한다.

특히 AI가 종교적 상상력과 결합할 때 위험은 더 커진다. 종교적 믿음은 때로 인간에게 위로와 공동체와 의미를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질문을 멈추게 만들 수도 있다.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대상은 쉽게 비판받지 않는다. AI도 마찬가지다. AI가 미래의 필연으로 신성화되면, 그 기술을 누가 소유하고 통제하는지 묻는 목소리는 뒤로 밀린다. 기술 발전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이해관계가 숨겨지는지 살펴야 한다.

AI 시대의 가장 큰 위험은 기계가 인간을 갑자기 지배하는 공상과학적 장면만이 아니다. 더 현실적인 위험은 인간이 스스로 판단을 포기하고, AI를 앞세운 권력 구조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모든 결정에 기술적 이유가 붙고, 모든 변화가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며, 모든 불평등이 데이터 기반 결과로 설명될 때 사회는 비판의 언어를 잃는다. 그때 AI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질서를 정당화하는 신화가 된다.

AI 시대에 필요한 것은 숭배가 아니라 거리두기다
AI를 비판적으로 본다는 것은 기술을 거부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AI가 중요해질수록 더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실제로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지 알아야 한다. 어떤 영역에서는 도움이 되지만, 어떤 영역에서는 위험한지 구분해야 한다. AI의 가능성을 인정하되, 그 가능성을 과장된 구원 서사로 바꾸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도구를 만들며 살아왔다. 불, 바퀴, 문자, 인쇄술, 전기, 컴퓨터, 인터넷은 모두 인간의 삶을 바꾸었다. 그러나 어떤 도구도 인간의 윤리와 책임을 완전히 대신하지는 못했다. 문자 덕분에 기억의 범위가 넓어졌지만, 무엇을 기록하고 어떻게 해석할지는 인간의 몫이었다. 인터넷 덕분에 정보 접근성이 높아졌지만, 무엇을 믿고 어떻게 판단할지는 여전히 인간의 과제였다. AI 역시 마찬가지다. AI는 인간의 능력을 확장할 수 있지만, 인간의 책임을 삭제할 수는 없다.

거리두기는 냉소와 다르다. 냉소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태도에 가깝지만, 거리두기는 믿음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살피는 태도다. AI가 유용하다는 사실과 AI가 절대적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믿음은 전혀 다르다. AI가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AI가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신화도 다르다. 기술에 대한 성숙한 태도는 열광과 공포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데서 시작된다.

AI를 둘러싼 논의에서 가장 필요한 질문은 “AI가 인간을 대체할 것인가”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인간은 AI를 통해 무엇을 믿고 싶어 하는가”다. 인간은 왜 완벽한 조언자를 원할까. 왜 감정 없는 판단자를 더 공정하다고 생각할까. 왜 불확실한 미래를 견디기보다 예측 시스템에 의존하려 할까. 왜 복잡한 사회 문제를 기술적 해결책으로 단순화하고 싶어 할까. 이런 질문을 던질 때 AI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인간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AI가 종교처럼 믿어지는 이유는 AI가 신이어서가 아니다. 인간이 여전히 구원을 원하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시대에 확실한 답을 원하고, 복잡한 세계에서 단순한 질서를 원하며, 실패와 책임의 부담을 대신 져줄 존재를 원하기 때문이다. AI는 바로 그 욕망이 모이는 자리에서 신화가 된다. 그리고 신화가 권력과 결합할 때, 기술은 단순한 혁신을 넘어 사회를 조직하는 힘이 된다.

따라서 AI 시대의 과제는 AI를 숭배하거나 두려워하는 데 있지 않다. AI를 인간의 오래된 욕망과 권력 구조 속에서 읽어내는 데 있다. 기술의 성능만 묻는 질문에서 벗어나, 기술을 향한 믿음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지 살펴야 한다. AI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는 일만큼, 인간이 왜 AI에게 그런 역할을 맡기고 싶어 하는지 묻는 일이 중요하다.

결국 인공지능을 이해하는 일은 인간을 이해하는 일과 분리되지 않는다. AI는 인간이 만든 기계이지만, 동시에 인간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까지 바꾸고 있다. 더 많이 알고 싶고, 더 오래 살고 싶고, 더 안전하게 선택하고 싶고, 더 완전한 판단을 원한다는 욕망이 AI 안에 투영된다. 그래서 AI를 둘러싼 논쟁은 기술의 미래에 관한 논쟁이면서, 인간이 어떤 존재로 남을 것인가에 관한 논쟁이기도 하다.

인공지능이 새로운 종교가 되는 순간은 기계가 신성을 획득할 때가 아니다. 인간이 질문을 멈추고, 판단을 넘기고, 책임을 흐리며, 기술의 이름으로 권력을 정당화할 때다. 반대로 AI가 좋은 도구로 남기 위해서는 계속 질문해야 한다. 누가 만들었는가. 어떤 데이터를 먹고 자랐는가. 누구의 세계관을 반영하는가. 어떤 사람에게 이익을 주고, 어떤 사람을 배제하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은 왜 이 기계를 그토록 믿고 싶어 하는가.

AI 시대의 지혜는 더 강력한 기계를 갖는 데서만 나오지 않는다. 그 기계 앞에서 인간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결정하는 데서 나온다. 숭배하지 않고, 맹신하지 않고, 무작정 두려워하지도 않는 태도. 가능성을 사용하되 권위를 넘겨주지 않는 태도. 기술을 통해 인간의 삶을 넓히되, 인간의 판단과 책임을 지키려는 태도. 그것이 AI가 신화와 권력의 장치가 아니라, 인간을 위한 도구로 남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