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couraging the News
뉴스를 보지 말라는 사람들
 
지은이 : Matt Carlson
출판사 : Oxford University Press
출판일 : 202609








누가 우리에게 뉴스를 보지 말라고 하는가
- 뉴스 회피 뒤에 숨은 불신, 플랫폼, 웰빙 그리고 민주주의

한때 뉴스는 ‘더 많이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정반대의 조언이 넘쳐난다. 정치인은 언론을 믿지 말라고 하고, 건강 전문가는 마음을 지키려면 뉴스를 줄이라고 권하며, 플랫폼은 보고 싶지 않은 정보를 손쉽게 숨겨준다.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뉴스를 외면하는 시대, 중요한 질문은 사람들이 왜 뉴스를 끄는가를 넘어 누가 그들에게 뉴스에서 멀어져도 된다고 말하는가로 이동한다.

[Key Message]
* 뉴스 회피는 개인이 화면을 끄는 순간에만 시작되지 않는다. 뉴스가 편향됐고 해롭고 필요 없다는 말이 반복될 때 시민과 뉴스 사이의 거리는 이미 벌어지기 시작한다.

* 뉴스에 대한 불신은 저절로 생겨나는 감정만이 아니다. 정치적 공격과 언론의 실패, 미디어 경쟁과 플랫폼 구조가 서로 얽히면서 무엇을 믿고 무엇을 배제할지가 형성된다.

* 뉴스를 보지 않는 행동에는 서로 다른 이유가 있다. 피로와 정신건강을 지키기 위한 선택도 있고, 왜곡된 보도에 항의하거나 기존 언론의 권위를 거부하기 위한 선택도 있다.

* 플랫폼 시대에는 무엇을 보는지만큼 무엇을 보지 않게 되는지가 중요하다. 차단과 숨기기, 맞춤형 추천과 알고리즘은 시민의 정보환경에서 뉴스가 차지하는 자리 자체를 바꾼다.

* 민주주의에 필요한 것은 무조건 더 많은 뉴스가 아니다. 시민이 다시 알아야 할 이유와 믿을 만한 이유를 느낄 수 있도록 저널리즘의 가치와 책임을 증명하는 일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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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가 넘치는데, 왜 뉴스에서 도망칠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을 켜면 세상은 이미 수십 개의 사건을 밀어 넣는다. 밤사이 벌어진 전쟁과 재난, 주가 급락, 정치인의 발언, 범죄 사건, 기후위기와 유명인의 논란까지 몇 분이면 한꺼번에 쏟아진다. 신문을 사거나 저녁뉴스 시간을 기다려야 했던 시대와 달리 이제는 뉴스를 찾아갈 필요가 없다. 뉴스가 하루 종일 사람을 찾아온다.

그래서 현대인의 문제는 ‘모르는 것’보다 ‘너무 많이 알게 되는 것’에 가까워졌다. 아침에는 뉴스를 보지 말고, 잠들기 전에는 알림을 끄며, 휴일에는 정치 뉴스에서 벗어나라는 조언이 자기관리법처럼 퍼진다. 반대편에서는 다른 이유로 똑같은 행동을 권한다. 주류 언론은 편향됐고 믿을 수 없으니 보지 말라는 주장이다.

출발점은 다르지만 종착지는 같다. 뉴스를 멀리하라는 것이다. 칼슨이 주목하는 지점도 여기다. 뉴스 회피를 단순히 “왜 어떤 사람은 뉴스를 보지 않는가”라는 개인의 선택 문제로 다루지 않고, 뉴스에 접근하지 말라고 권하거나 뉴스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말과 행동을 함께 들여다본다.

이 관점에서는 스마트폰에서 뉴스 앱을 지운 사람만 뉴스 회피자가 아니다. 정치인의 공격, 플랫폼의 설계, 정신건강을 위한 조언, 특정 공동체의 언론 비판처럼 서로 다른 힘들이 시민과 뉴스 사이의 거리를 넓힐 수 있다. 뉴스 회피가 개인 행동이라면 해결책은 다시 뉴스를 보라고 설득하는 데 그치지만, 뉴스 단념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현상이라면 이야기는 훨씬 복잡해진다.

불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언론은 언제나 비판받아왔다. 오보와 편향, 선정주의와 권력 유착은 실제로 존재했고, 언론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은 민주주의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특정 기사가 잘못됐다고 비판하는 것과 “언론은 모두 거짓말을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행동이다. 앞의 비판은 더 나은 뉴스를 요구하지만 뒤의 공격은 뉴스를 판단할 필요 자체를 없애버린다.

정치에서는 이 차이가 특히 중요하다. 자신에게 불리한 보도의 내용을 하나하나 반박하는 것보다 해당 언론사의 동기와 정당성을 공격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저 언론은 우리를 싫어한다”, “기득권의 대변자다”, “가짜뉴스다”라는 말이 반복되면 기사의 사실 여부보다 누가 보도했는지가 먼저 판단 기준이 된다. 언론 보도를 반박하지 않고 언론이라는 심판의 자격을 박탈하는 전략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언론을 ‘국민의 적’으로 공격해온 장면은 이런 방식이 얼마나 강력한 정치적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언론을 하나의 적대 집단으로 묶어버리면 이후에 나오는 불리한 기사도 내용을 검토하기 전에 적의 공격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불신은 감정에 그치지 않고 특정 정보를 보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제공하는 정치적 자원이 된다.

하지만 책임을 정치권에만 돌릴 수는 없다. 클릭을 위한 과장된 제목, 지나치게 반복되는 갈등 보도, 특정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 보도의 오류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 태도는 뉴스에 대한 실제 불만을 축적한다. 외부에서 누군가 불신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언론 내부의 잘못도 그 불신이 뿌리내릴 토양을 제공한다.

그래서 뉴스에서 멀어지는 사람을 단순히 무지하거나 민주주의에 무관심한 시민이라고 비난하는 방식은 문제를 풀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불신 속에서 의도적으로 조성된 공격과 실제 뉴스 경험에서 발생한 실망을 구별하는 것이다. 언론이 신뢰를 되찾으려면 “우리를 믿어라”라는 주장보다 왜 믿음을 잃었는지부터 설명해야 한다.

보지 않는 뉴스도 플랫폼이 결정한다
종이신문 시대에 뉴스를 피하는 방법은 단순했다. 신문을 사지 않고 텔레비전 뉴스 채널을 틀지 않으면 됐다. 디지털 시대에는 이용자가 직접 뉴스를 거부하지 않아도 뉴스가 자연스럽게 시야에서 사라질 수 있다. 무엇을 선택하지 않았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정보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에는 숨기기, 차단, 음소거, 팔로우 해제 같은 기능이 있다. 정보가 넘치는 환경에서 이런 장치는 꼭 필요하다. 모든 게시물과 모든 의견을 받아들이며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편리한 필터가 계속 쌓이면 자신에게 불편하거나 관심 없는 현실 전체를 밀어내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

더 큰 영향력을 갖는 것은 추천 알고리즘이다. 이용자는 피드에 나타나는 모든 내용을 직접 고르지 않는다. 과거에 무엇을 클릭했고 얼마나 오래 봤으며 어떤 콘텐츠에 반응했는지를 바탕으로 플랫폼이 다음 화면을 구성한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를 결정한다는 것은 동시에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지도 결정한다는 뜻이다.

뉴스는 이 경쟁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지 않는다. 전쟁 보도 옆에는 친구의 여행 사진이 있고, 경제 기사 다음에는 짧은 코미디 영상이 나오며, 중요한 정책 분석은 쇼핑 광고와 이용자의 시간을 두고 경쟁한다. 플랫폼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시민의 공적 지식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이용자를 오래 붙잡아두는 데 있다면 어렵고 불편한 뉴스가 밀려날 가능성은 커진다.

이 지점에서 뉴스 단념은 “뉴스를 보지 마세요”라는 문장조차 필요로 하지 않는다. 뉴스가 피드 아래로 내려가고 그 자리를 더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콘텐츠가 채우면 된다. 시민은 뉴스를 거부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어느 순간 뉴스와 멀어진 정보환경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

편안한 정보환경은 개인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지만 민주주의에는 다른 문제가 생긴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현실, 관심 없던 사회문제, 불편하지만 알아야 하는 사실을 만날 기회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선택의 자유와 공동체가 공유해야 할 최소한의 현실 사이에서 플랫폼 시대의 뉴스 소비는 새로운 긴장을 만들어낸다.

뉴스가 ‘오염’으로 취급되는 순간
모든 뉴스가 많이 퍼질수록 좋다는 생각에도 예외는 있다. 특정 범죄 보도가 인종이나 지역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하고, 자살을 자극적으로 보도해 모방 위험을 높이며, 극단주의자의 메시지를 무비판적으로 반복해 오히려 선전 효과를 제공한다면 “더 많이 알리는 것이 공익”이라는 공식은 흔들린다. 뉴스가 공공재가 아니라 사회에 해를 끼치는 일종의 오염원처럼 취급되는 순간이다.

이러한 비판을 단순히 언론에 대한 공격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렵다. 취재와 보도에는 언제나 선택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을 뉴스로 만들지, 피해자와 가해자 가운데 누구에게 초점을 맞출지, 어떤 사진을 사용할지, 특정 장면을 얼마나 반복할지는 언론사가 결정한다. 같은 사건도 편집 방식에 따라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사회적 의미를 남길 수 있다.

특히 오랫동안 언론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로 반복 재현된 공동체라면 “우리를 이런 방식으로 보도하지 말라”는 요구는 뉴스 자체를 없애자는 주장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더 정확하고 덜 해로운 방식으로 보도하라는 요구에 가깝다. 자신을 지속적으로 왜곡한다고 느끼는 매체를 보지 않기로 하는 것도 정치적 무관심이 아니라 언론의 방식에 대한 비판적 선택이 될 수 있다.

여기에서 뉴스 단념의 복잡성이 드러난다. 부패를 보도한 언론을 권력자가 거짓말쟁이라고 공격하는 행동과, 왜곡된 재현에 항의하는 공동체가 특정 매체를 거부하는 행동은 표면적으로는 둘 다 “그 뉴스를 보지 말라”는 형태를 띤다. 그러나 하나는 권력 감시를 약화시키려는 시도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언론의 책임성을 높이려는 요구일 수 있다.

따라서 뉴스 회피의 의미를 판단하려면 누가 멀리하라고 말하는지만큼 왜 그렇게 말하는지를 봐야 한다. 뉴스가 항상 좋은 것이라는 전제를 내려놓는 순간 언론의 자유와 언론의 책임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뉴스를 끊으면 마음은 편해질까
뉴스를 보지 말라는 조언 가운데 가장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유는 정치가 아니라 건강이다. 전쟁과 재난, 범죄, 경제위기, 기후재난과 정치적 갈등이 실시간으로 휴대전화에 도착하면 시민은 세상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지친다. 한 번의 저녁뉴스로 하루를 정리하던 시대와 달리 사건은 하루 종일 알림 형태로 침투한다.

그래서 ‘뉴스 다이어트’가 하나의 생활습관으로 자리 잡는다. 하루에 정해진 시간에만 뉴스를 확인하고, 잠자기 전에는 보지 않으며, 주말에는 의도적으로 멀어지는 방식이다. 여기서 뉴스 회피는 무책임한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적 에너지를 관리하는 현명한 선택으로 의미가 달라진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시민이 자신이 사는 사회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전제 위에서 움직인다. 선거에서 판단하려면 정책을 알아야 하고, 자신의 삶 밖에서 발생하는 불평등과 갈등을 이해하려면 뉴스가 필요하다. 모두가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뉴스를 차단한다면 공동체가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현실의 기반도 약해질 수 있다.

반대로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 하루 종일 재난과 분노를 소비해야 한다고 요구할 수도 없다. 여기에서 질문은 시민의 책임에서 뉴스의 책임으로 되돌아온다. 사람들이 뉴스를 중요하지 않아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너무 반복적이고 부정적이며 자신의 행동으로 무엇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을 주기 때문에 떠나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뉴스 피로는 뉴스의 양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같은 갈등을 끝없이 반복하면서 배경과 해결 가능성은 충분히 설명하지 않고, 가장 충격적인 장면으로 주의를 끌려는 방식도 피로를 키운다. 뉴스를 덜 보려는 사람에게 더 보라고 훈계하기 전에, 뉴스가 왜 그렇게 지치는 상품이 되었는지를 묻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다.

보지 않는 것이 저항이 될 때
뉴스를 거부하는 행동은 때로 매우 적극적인 정치 행위가 된다. 특정 신문의 구독을 끊고, 특정 방송을 보지 않으며, 광고주에게 압력을 가하는 보이콧은 뉴스 소비를 하나의 의사표현 수단으로 만든다. 여기에서 회피는 관심이 없어서 떠나는 행동이 아니라 “이 방식의 보도에는 더 이상 나의 시간과 돈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디지털 환경은 이런 선택의 비용을 크게 낮춘다. 구독 취소에는 몇 번의 클릭이면 충분하고, 소셜미디어에서는 팔로우 해제와 차단으로 즉각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뉴스 소비자는 수동적인 독자나 시청자만이 아니라 관심과 구독료, 광고 가치의 흐름을 움직이는 참여자가 된다.

하지만 모든 보이콧을 같은 의미로 평가할 수는 없다. 반복되는 잘못된 보도 관행을 바꾸기 위한 소비자의 압력은 언론의 책임성을 높일 수 있다. 반대로 자신에게 불편한 사실을 보도했다는 이유만으로 언론사를 공격하고 기자의 취재를 위축시키려는 행동은 권력 감시 기능을 약화시킨다.

그래서 뉴스를 보지 않는 사람이 반드시 나쁜 시민인 것도 아니고, 하루 종일 뉴스를 소비하는 사람이 반드시 좋은 시민인 것도 아니다. 편향된 한 종류의 정보만 반복해서 소비하는 사람이 여러 출처를 제한적으로 확인하는 사람보다 현실을 더 잘 이해한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뉴스 소비량이 아니라 시민이 어떤 정보환경 속에서 판단하고 있는가다.

이 관점은 뉴스 회피를 둘러싼 익숙한 도덕적 구도를 흔든다. ‘뉴스를 보는 시민 대 보지 않는 시민’이라는 단순한 구분 대신 어떤 뉴스를 왜 선택하거나 거부하는지, 그 과정에서 누가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살펴보게 만든다. 뉴스 단념은 때로 민주주의를 해칠 수 있지만 때로는 더 나은 저널리즘을 요구하는 압력이 되기도 한다.

인공지능은 새로운 뉴스 문지기가 될까
뉴스와 시민 사이에는 이제 또 하나의 중개자가 들어오고 있다. 인공지능이다. 검색 결과에서 기사 여러 개를 열어보는 대신 “오늘 중요한 뉴스만 정리해줘”라고 묻고, 정책이나 국제분쟁의 의미까지 대화형 인공지능으로 설명받는 일이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정보에 접근하는 속도와 편의성은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높아진다.

하지만 편리함이 커질수록 뉴스의 출처는 오히려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여러 언론사가 취재한 내용을 인공지능이 하나의 답으로 요약한다면 이용자는 정보를 얻으면서도 어떤 기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 그 사실을 확인했는지 알지 못할 수 있다. 뉴스를 소비하면서 뉴스 조직을 만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뉴스 소비가 가능해지는 셈이다.

여기에서 권위의 문제가 다시 등장한다. 과거에는 “어느 언론이 보도했는가”가 정보의 신뢰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단서였다. 인공지능 시대에는 “인공지능이 그렇게 말했다”는 사실 자체가 새로운 권위처럼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출처를 선택했고 무엇을 생략했으며 서로 충돌하는 정보에 어떤 비중을 줬는지가 보이지 않는다면 필터링의 과정은 오히려 더 불투명해진다.

그렇다고 취재하는 언론의 필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직접 돌아다니며 모든 사건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면 누군가는 현장에 가서 질문하고 자료를 검증하며 사실을 생산해야 한다. 달라지는 것은 시민에게 정보가 도착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그 취재의 흔적이 희미해질 가능성이다.

따라서 미래의 뉴스 회피는 뉴스를 ‘보느냐 안 보느냐’라는 문제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기사를 한 편도 직접 읽지 않으면서 뉴스 조직이 생산한 사실을 매일 소비하는 사람이 늘어날 수 있다. 뉴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뉴스라는 형식과 그것을 만든 사람의 존재가 화면 뒤로 사라지는 것이다.

더 많은 뉴스보다 다시 볼 이유
뉴스를 보지 않는 현상을 민주주의의 위기라고만 정의하면 해법도 단순해진다. 시민에게 더 많은 뉴스를 보라고 요구하면 된다. 그러나 뉴스에서 멀어지는 이유에는 정치적 선동과 불신, 피로, 정신건강, 언론의 실패, 공동체의 정당한 비판이 뒤섞여 있다. 서로 다른 이유를 가진 사람을 모두 ‘뉴스에 관심 없는 시민’으로 묶는 순간 해결책도 잘못된 방향으로 향한다.

그래서 질문을 바꿀 필요가 있다. 왜 사람들은 뉴스를 보지 않는가가 아니라, 왜 뉴스가 볼 가치가 없다고 느끼게 되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 질문은 책임의 일부를 시민에게서 다시 저널리즘으로 돌려놓는다.

언론은 민주주의에 중요하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신뢰받을 수 없다. 무엇이 사실인지 정확히 검증해야 하고, 오류가 발생하면 설명해야 하며, 특정 사건을 왜 중요하게 다루는지 보여줘야 한다. 시민의 삶과 멀어진 뉴스라면 연결점을 찾아야 하고, 특정 공동체를 반복해서 왜곡했다면 그 보도 관행 역시 바뀌어야 한다.

동시에 언론의 잘못을 고치는 것과 언론을 무력화하는 것은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권력자가 불리한 보도를 막기 위해 조직적으로 불신을 만들어내는 상황에서 언론이 모든 비판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정당한 비판에는 변화로 답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 언론의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공격에는 사실과 취재로 맞서야 한다.

칼슨이 바라보는 뉴스 단념은 그래서 저널리즘의 종말에 관한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사람들이 왜 뉴스에 등을 돌리는지 제대로 이해하면 저널리즘이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도 더 선명하게 보인다. 뉴스 단념은 언론에게 불편한 현상이지만 동시에 시민이 뉴스에서 무엇을 원하고 무엇에 실망했는지를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하다.

좋은 시민에게 필요한 것은 하루 종일 뉴스를 보는 습관이 아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파악할 수 있고, 그 정보를 왜 믿어도 되는지 판단할 수 있으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정보환경이다. 뉴스의 가치는 얼마나 많이 소비되는가가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다시 돌아올 만한 이유를 제공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래서 “뉴스를 보지 말라”는 목소리가 커지는 시대에 저널리즘이 던져야 할 질문도 달라진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뉴스를 더 많이 보게 만들 것인가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다시 볼 이유가 있는 뉴스를 만들 것인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