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불안의 정치학: 전 세계를 뒤덮는 우경화의 물결
21세기 초반, 특히 2010년대 이후 세계 곳곳에서 우경화 현상이 눈에...



  • 분노와 불안의 정치학: 전 세계를 뒤덮는 우경화의 물결

    우경화의 글로벌 확산: 현상의 개요와 주요 사례
    21세기 초반, 특히 2010년대 이후 세계 곳곳에서 우경화 현상이 눈에 띄게 확산되고 있다. 우경화란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서 보수주의 혹은 극우적 가치와 정책이 지지를 얻고 중심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뜻한다. 이는 단순히 기존 보수정당의 부상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보다 강경한 이민정책, 국가주의적 담론,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 등이 사회 전반을 관통하게 되는 복합적 현상이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내세우며 전통적 정치 엘리트와 진보 세력에 반감을 품은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마린 르펜(국민연합), 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이탈리아 형제들), 헝가리의 오르반 총리(피데스당) 등이 반이민, 반다문화, 유럽연합 회의론을 앞세워 지지를 끌어올리고 있다. 일본과 한국에서도 강경 외교, 반공주의, 전통 가치 복원 등 보수적 흐름이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우경화는 한두 국가의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국제적인 공통점을 지닌 구조적 흐름이다. 그것은 불안한 시대의 ‘정체성 회복’ 욕구와 연결되어 있으며, 정치적 레토릭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제도 변화와 정책에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젊은 세대의 우경화: 현상과 배경
    놀랍게도, 전통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지니던 젊은 세대의 정치 성향이 최근 여러 국가에서 눈에 띄게 우경화되고 있다. 이는 기존 정치사회 이론에 반하는 흐름이며, 각국에서 세대를 막론한 정치 지형 변화의 핵심 축이 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 20~30대 남성 유권자들이 2010년대 후반 이후 진보 진영에 대한 실망감과 반페미니즘 정서, 공정 담론에 대한 민감성 등을 이유로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일본에서도 젊은 층은 자유주의보다는 안보와 경제 안정성을 우선시하며 자민당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프랑스에선 젊은 유권자들 사이에서 마린 르펜의 강경한 반이민 정책이 오히려 ‘현실적’ 대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작용하고 있다:

    - 경제적 불안정: 고용 불안, 주거비 상승, 사회적 사다리의 붕괴는 청년층에게 '공정성'에 대한 예민함을 키웠고, 기존 진보 세력의 정책이 체감되지 않는다는 불신으로 이어졌다.

    - 정체성 피로감: 성소수자, 여성, 이민자 등 다양한 소수자의 권리 향상을 주장하는 ‘정체성 정치’에 대한 반감이 ‘역차별’이라는 인식과 결합해 보수적 반동을 불러왔다.

    - 온라인 문화와 알고리즘: 유튜브, 트위터, 틱톡 등 SNS 기반의 정보 확산 구조는 정치적 논의의 ‘극단화’를 촉진하며, 간결하고 강한 메시지를 던지는 우파 콘텐츠가 젊은 층 사이에서 빠르게 퍼진다.

    이는 단순한 ‘보수화’가 아니라, 사회체계 전반에 대한 냉소적 거리두기와 일종의 정치적 '역공'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정권의 우경화: 권력 구조의 이동
    정권 차원의 우경화는 정치 시스템의 중심축이 보수적 가치와 강경 정책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정치인들은 대중의 불안과 분노를 조직적으로 수렴하고, 이를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통치에 반영하는 전략을 취한다.

    대표적으로 헝가리의 오르반 총리는 "비자유주의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를 공공연히 천명하며, 법원, 언론, 대학 등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 나갔다.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는 언론을 "국민의 적"이라 규정하고, 행정명령으로 이민을 막는 등 권한 집중적 리더십을 선보였다. 브라질의 보우소나루는 환경단체, 여성운동, 원주민 보호 단체를 모두 ‘좌파 엘리트’로 규정하며 무력화했다.

    한국의 경우에도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 방송통신위원회의 편향성 논란, 역사 교과서의 방향성과 같은 이슈에서 이념 대립이 첨예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권력을 장악한 정치 집단은 종종 제도적 중립성과 다원주의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사회 전반에 '질서'와 '안정'을 강조한다.

    정권 우경화는 선거 승리를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시작되지만, 장기적으로는 제도적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우경화의 배경 요인: 구조적 변화의 복합 작용
    우경화는 단순히 보수정당의 선전이나 우파 담론의 확산 때문만은 아니다. 사회 전반의 구조적 변화가 사람들로 하여금 보수적 사고에 의존하게 만드는 심리적·제도적 배경이 존재한다.

    - 세계화의 역풍: 노동시장 유연화, 이민 증가, 전통 산업의 쇠퇴 등은 기존 중산층과 하층민에게 정체성 상실과 경제적 위기를 안겨줬다. 이들은 이민자와 소수자, 자유무역을 희생양 삼는 담론에 쉽게 끌린다.

    - 불평등과 계층 사다리 붕괴: 많은 국가에서 교육, 주거, 의료 등 기본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이 제한되면서 하위 계층의 절망감이 커졌다. ‘엘리트는 살기 좋은 세상’이라는 박탈감은 좌파보다 강한 우파적 분노로 표출되곤 한다.

    - 테크놀로지와 SNS 알고리즘: 유튜브, 틱톡, 트위터는 정치 담론의 복잡성을 줄이고 감정과 분노에 호소하는 메시지를 부각시킨다. 이 과정에서 음모론, 반이민 정서, 대중 선동적 메시지가 주목을 끈다.

    - 팬데믹 이후의 통제 강화: 코로나19는 각국 정부가 시민의 일상과 이동, 경제 활동을 통제하는 전례 없는 시기를 초래했다. 이에 따른 통제 피로감과 반감은 극우 정치인에게 ‘자유를 되찾자’는 구호로 연결됐다.

    우경화는 따라서 심리적 안정을 추구하려는 ‘보호 본능’의 집단적 정치화이기도 하다. 이는 단지 ‘이념의 전환’이 아니라, 사회적 신뢰, 계층 이동 가능성, 공동체 연대의 붕괴가 낳은 결과다.

    전망과 대응: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
    우경화는 단기적 현상인가, 아니면 새로운 정치 질서의 구조적 재편인가? 현재로선 그 지속 가능성을 단정 짓기 어렵지만, 몇 가지 주요 전망과 대응 가능성을 검토할 수 있다.

    - 정치 양극화의 고착화: 중도 정당의 약화와 좌우 양극단의 공고화는 쉽게 되돌리기 어려운 추세다. 이념의 중간 지대는 점차 사라지고, 정치 토론은 적대적 경쟁으로 치닫는 경향을 보인다.

    - 민주주의의 압박과 전환: 자유민주주의는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에 도전받고 있으며, 이는 선거만으로는 되돌릴 수 없는 구조적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헌법과 사법부, 언론의 독립성이 이를 막는 마지막 방어선이 된다.

    - 진보 진영의 전략 부재: 진보 세력은 정체성 정치의 확장 이후, 실질적 계층 기반과 경제정책에서 매력을 잃고 있다. 실용성과 포용력을 회복하지 못하면, 우경화에 대한 효과적 대응은 어려워질 수 있다.

    - 시민사회와 교육의 역할: 정치적 중립성과 비판적 사고를 길러주는 교육, 정보 균형을 잡아주는 언론과 미디어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민주주의의 지속 가능성은 결국 시민들의 정치적 성숙도에 달려 있다.

    앞으로 세계는 ‘보수화된 자유주의’와 ‘권위주의적 대중주의’ 사이에서 갈등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 과정에서 우경화가 어느 정도 제도화되며, 그에 대한 반작용 또한 새로운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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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경화는 특정 이념의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세계화의 그늘, 불평등의 누적, 정치 엘리트에 대한 대중의 불신, 그리고 소통 구조의 급변이 만들어낸 복합적 결과다. 젊은 층의 보수화와 정권의 우경화는 이 구조적 불안을 반영하는 거울이며, 그에 대한 대응은 단순한 ‘진보 대 보수’의 프레임으로는 부족하다.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것은 단지 정치의 변화가 아니라, '시민성과 민주주의, 공동체적 연대의 재정의가 요구되는 시대'다. 이를 위해선 진영 간 정쟁을 넘어선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과 포용의 기술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