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재정위기의 귀환 ? 다시 흔들리는 금고의 대륙
유럽의 금고가 다시 흔들리고 있다. 위기에서 회복한 줄 알았던 국가들이 ...



  • 유럽 재정위기의 귀환 — 다시 흔들리는 금고의 대륙

    유럽의 금고가 다시 흔들리고 있다. 위기에서 회복한 줄 알았던 국가들이 이제는 복지와 부채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다. 돈의 값이 높아진 시대, 유럽은 숫자가 아니라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불안의 서곡 — 유럽 금고에서 울리는 경고음
    유럽의 재정이 다시 흔들리고 있다. 위기를 극복했다고 믿었던 나라들이 다시 적자의 늪에 빠지고 있다. 경제의 심장부에서 울리는 경고음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신뢰의 균열이다.

    유럽 대륙의 재정 건전성이 다시 한 번 시험대에 올랐다. 2010년 그리스에서 시작된 유로존 부채위기가 15년 만에 되살아나는 듯한 조짐이 뚜렷하다. 이번에는 남유럽의 취약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럽의 양대 축인 프랑스와 독일마저 재정 불안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2025년 가을, 국제신용평가사 피치(Fitch)는 프랑스의 신용등급을 ‘AA’에서 한 단계 강등했다. 금융시장은 즉각 반응했고, 프랑스 10년물 국채 금리는 하루 만에 3.6%를 돌파하며 2013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동시에 독일의 재정안정위원회는 부채비율이 2029년까지 GDP의 80%를 넘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럽의 재정 모범국’이던 독일까지 흔들리는 장면은 대륙 전체에 상징적 충격을 주었다.

    이 불안은 단순한 경기 순환의 문제가 아니다. 고금리, 고물가, 저성장이라는 삼중 압력이 각국의 재정을 조여오면서 구조적 균열이 드러나고 있다. 팬데믹 대응 과정에서 한껏 풀린 재정이 제어되지 못한 채 확대 지출로 굳어졌고, 거기에 우크라이나 전쟁과 에너지 전환 비용, 복지 확대 압력까지 겹치며 ‘지속 가능성’의 한계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인플레이션 억제와 경기 방어 사이에서 방향을 잃고, 정치권은 긴축과 포퓰리즘 사이에서 흔들린다. 한때 ‘안정의 대륙’이라 불리던 유럽은 이제 위기와 피로, 그리고 정치적 무기력이 뒤섞인 불안의 지대로 변하고 있다.

    팬데믹의 청구서 — 부양의 시대가 남긴 거대한 빚
    생존을 위한 지출이 미래를 갉아먹고 있다. 팬데믹은 유럽의 복지국가 모델에 거대한 청구서를 남겼다. 위기 극복의 상징이던 재정이 이제는 새로운 위기의 근원이 되고 있다.

    2020년 코로나19는 유럽 재정 시스템의 구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생명과 일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절박한 목표 아래, 각국 정부는 “무제한 부양”이라는 이름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풀었다. 독일은 ‘방패(der Schutzschild)’ 프로그램을 통해 기업 대출 보증과 실업수당을 확대했고, 프랑스는 GDP의 20%에 해당하는 긴급 지출을 단행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 같은 남유럽 국가는 팬데믹 대응과 동시에 구조적 복지지출을 늘리며 부채의 덫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EU 회원국 전체의 평균 부채비율은 팬데믹 이전 80%에서 2025년 현재 95%를 넘었고, 일부 국가는 GDP의 120~150%를 초과했다.

    문제는 이 빚이 단기간에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팬데믹 당시 늘어난 지출의 상당 부분이 ‘일시적 위기 대응’이 아니라 ‘상시 복지화’로 굳어졌다. 의료, 실업, 에너지 보조금 등이 구조화되면서 지출을 줄이기 어려워졌고, 금리가 높아진 지금 이자 비용은 예산의 큰 몫을 차지한다. 프랑스는 2025년 예산에서 이자지출만 510억 유로로, 국방비보다 많았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부채의 복리 위기(compound debt crisis)”라 부른다. 국가가 내야 할 이자에 다시 이자가 붙는 구조적 악순환이다.

    유럽 재정의 약점은 더 이상 남유럽만의 문제가 아니다. 독일은 전쟁 이후 국방력 강화를 위해 ‘특별방위기금(1000억 유로)’을 만들었고, 인프라 재건 투자까지 더하며 부채를 늘리고 있다. 북유럽 국가들조차 복지 유지와 에너지 전환 비용으로 예산을 압박받고 있다. 팬데믹 이후의 유럽은 ‘확장재정의 후유증’이라는 거대한 빚의 산을 마주하고 있다. 위기를 막기 위한 지출이 또 다른 위기를 부르고 있는 셈이다.

    돈의 값이 바뀐 세계 — 고금리 시대의 역습
    돈의 값이 싸던 시절은 끝났다. 0% 금리의 달콤한 시대가 저물자, 유럽의 국가 재정은 진짜 실력을 드러내고 있다. 고금리는 단지 경제정책이 아니라 정치의 내구성을 시험하는 변수다.

    유럽중앙은행(ECB)은 2022년 이후 본격적인 금리 인상 기조로 돌아섰다.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부채가 많은 국가에게는 치명타가 되었다. 팬데믹 시기 저금리로 발행한 장기국채들이 만기를 맞으면서 새로 조달해야 하는 자금의 금리가 두 배 이상 치솟았다. 프랑스의 10년물 국채 수익률은 2021년 0.1%에서 2025년 3.5%로 상승했고, 이탈리아는 4.7%를 넘어섰다. 이자 지출은 폭발적으로 늘었고, 이는 다시 예산 적자를 키우는 악순환을 만들었다.

    고금리의 역습은 단지 재정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경제성장의 동력이 약한 유럽에서 고금리는 민간 투자와 소비를 제약하며 경기 회복을 더디게 만든다. 독일의 제조업 생산지수는 2025년 상반기 12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고, 프랑스의 실업률은 다시 8%대로 올라섰다. 기업의 자금조달 비용이 커지고, 정부의 재정여력은 줄며, 사회는 ‘긴축의 그림자’ 아래로 들어간다.

    문제는 유럽의 중앙은행이 더 이상 ‘구조적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과거처럼 양적완화로 채권을 대거 매입하거나 금리를 급격히 내릴 여지가 사라졌다. ECB의 라가르드 총재는 “정치가와 정부가 책임을 나눠야 한다”고 말했지만, 각국 정부는 선거를 의식해 지출 삭감 대신 단기 지원책을 반복한다. 고금리는 이제 단순한 경제 현상이 아니라, 유럽의 정치적 무능을 드러내는 거울이 되었다.

    균열의 지형 — 프랑스의 마비, 독일의 균열, 남유럽의 압박
    유럽 재정위기의 불길은 더 이상 변두리의 문제가 아니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 유럽의 세 축이 동시에 흔들린다. 각국의 위기 양상은 다르지만, 공통된 언어는 하나다. ‘정치의 마비와 신뢰의 상실’.

    프랑스는 지금 가장 위험한 재정 실험대 위에 서 있다. 사회적 복지와 공공부문 의존도가 높은 프랑스는 오랫동안 “국가가 국민을 지탱한다”는 신념 위에 복지국가 모델을 세웠다. 그러나 2025년 들어 이 모델의 한계가 드러났다. 114%에 달하는 국가부채, 5%를 넘는 재정적자, 그리고 정치적 공백이 겹치며 정부 기능이 사실상 정지 상태에 빠졌다. 마크롱 대통령의 정치적 리더십은 약화되고, 하원은 예산안 처리를 둘러싸고 극단적으로 분열됐다. 투자자들은 프랑스 국채를 “안전하지 않은 자산”으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반면 독일은 재정 규율의 상징이었지만, 그 균열은 조용히 내부에서부터 벌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방위비를 GDP의 2% 이상으로 끌어올리며, “균형예산(Balanced Budget Rule)”을 유지하던 전통이 흔들렸다. 인프라 재건과 기후중립을 위한 에너지 전환 비용이 더해지면서 2029년에는 부채비율이 GDP의 80%를 넘을 것이라는 경고가 나왔다. 독일 언론은 이를 “예산 블랙홀(Budget Black Hole)”이라 불렀다.

    남유럽의 상황은 더 직접적이다. 이탈리아는 GDP 대비 부채가 140%를 넘어섰고, 스페인은 실업률과 고령화가 동시에 재정 압박을 가중시킨다. 10년물 국채 금리는 5%를 돌파하며 ‘그리스 사태’ 당시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이번 위기는 과거처럼 특정 국가의 도덕적 해이 문제가 아니다. 모든 국가가 구조적으로 더 많은 지출을 약속한 사회에서, 고금리 시대를 맞은 결과다.

    균열은 재정만이 아니라 사회의 균열로 이어진다. 긴축과 복지 사이의 갈등, 청년세대의 절망, 그리고 중산층의 붕괴가 동시에 나타난다. 각국 정부는 단기 현금 지원으로 불만을 누그러뜨리려 하지만, 이는 다시 부채를 늘리는 악순환을 낳는다. 프랑스의 거리에서는 “세금보다 삶이 먼저”라는 구호가 울리고, 독일의 언론은 “재정의 위기는 곧 사회계약의 붕괴”라고 경고한다. 지금의 유럽은 숫자의 위기보다 더 근본적인, 사회적 균열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재정과 정치의 악순환 — 숫자보다 신뢰가 무너진다
    지금의 유럽 위기는 단순한 예산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신뢰의 위기다. 정책에 대한 신뢰, 정부에 대한 신뢰, 그리고 미래에 대한 신뢰가 연쇄적으로 붕괴되고 있다.

    재정위기 국면에서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것은 ‘정치의 내구성’이다. 긴축정책을 추진하면 국민의 반발이 커지고, 선거를 의식해 지출을 늘리면 시장이 등을 돌린다. 그 사이에서 정부는 줄타기를 하듯 균형을 맞추려 하지만, 그 줄은 이미 해체되고 있다. 2024년 말 프랑스 정부는 공공지출 삭감을 발표했지만, 곧바로 거리 시위와 노조 총파업이 이어졌다. 정부는 한 발 물러섰고, 금융시장은 즉각 불안을 반영했다. 한 분석가는 “프랑스의 예산안은 국민이 아니라 투자자에게 표결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탈리아는 더 극단적인 사례다. 국민총선에서 반(反)EU 정당이 다시 약진하며, 긴축 반대 여론이 고조됐다. 그러나 시장은 정반대로 움직였다. 채권 금리가 오르자, 정부는 다시 긴축안을 제출했다. 그 결과는 ‘경제 정책의 신뢰 붕괴’였다. 정부가 무슨 결정을 내려도, 누구도 믿지 않는 상태 — 이것이 재정위기의 진짜 본질이다.

    정치 불안은 단순히 행정의 마비로 끝나지 않는다. 투자자들이 빠져나가고, 기업들은 불확실성을 이유로 투자를 미룬다. 경기 침체는 세수 감소로 이어지고, 세수 감소는 다시 부채를 키운다. 악순환의 고리는 단단하다. 그리스의 위기를 겪은 유럽은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지금의 유럽은 다른 얼굴의 같은 함정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이번에는 경제보다 정치가 더 취약하다는 점이 다르다.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신뢰다. 국민이 정부의 계획을 믿을 수 있는 제도적 신뢰, 시장이 정책의 방향을 믿을 수 있는 예측 가능성, 그리고 정치권이 공동의 목표를 믿을 수 있는 협치의 신뢰. 그러나 지금의 유럽은 이 세 가지를 모두 잃어가고 있다.

    공동 운명체의 시험 — 유럽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까
    유럽연합(EU)은 지금 “공동의 금고”라는 개념 그 자체를 시험받고 있다. 한 회원국의 부채는 이제 단지 그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유럽 전체의 신뢰에 직결되는 문제다.

    유럽은 과거에도 위기를 통해 통합을 심화시켜 왔다. 2010년의 유로존 위기 때 ‘유럽안정화기구(ESM)’가 탄생했고, 2020년 팬데믹 때는 역사상 처음으로 EU 공동채권(EU Bonds)을 발행했다. 그러나 이번 위기는 이전보다 복잡하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너무 다르고, 정치적 극단화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독일과 네덜란드는 여전히 “재정규율 복원”을 주장하지만,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공동부채를 통한 경기 대응”을 요구한다. 유럽연합의 예산집행위원회는 2025년 이후 각국에 “완만한 재정긴축(slight fiscal tightening)”을 권고했지만, 회원국의 절반 이상이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럽은 이번에도 ‘공동체의 논리’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 구제금융 이후 쌓인 제도적 경험, 유럽중앙은행의 위기대응 도구, 그리고 정치적 연대의 필요성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유럽위원회의 관계자는 “이번 위기의 성격은 재정이 아니라 정치의 신뢰 문제이며, 이것은 각국이 아니라 유럽 전체의 문제”라고 말했다.

    유럽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을지의 핵심은 단 하나 — “연대의 진정성”이다. 공동부채 발행, EU 차원의 국방 예산, 녹색전환 투자 등이 그 시험대 위에 있다. 그러나 만약 회원국 간의 불신이 더 커진다면, 이번 위기는 단순한 재정위기를 넘어 유럽통합의 위기로 확산될 가능성도 있다.

    한국의 그림자 — 복지와 부채의 경계에서
    유럽의 위기는 결코 먼 나라의 일이 아니다. 한국 역시 고령화, 복지 확장, 경기 둔화라는 세 가지 변수 속에서 같은 위험의 그림자를 보고 있다.

    한국의 국가채무비율은 2017년 36%에서 2025년 58%를 넘어섰다. OECD 평균보다는 낮지만, 증가 속도는 가장 빠르다. 복지지출은 전체 예산의 절반에 달하고, 세수 부족으로 인한 적자국채 발행이 반복되고 있다. 인구구조는 더 심각하다. 고령인구가 전체의 25%를 넘어서는 2030년에는 연금·의료·돌봄 등 사회복지지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한국의 상황은 프랑스의 20년 전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지금의 한국 재정은 아직 ‘위기’라 부르기엔 견고하지만, 지속 가능성의 경고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복지 확대를 정치적 공약으로만 다루고, 재원 구조 개혁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유럽과 같은 늪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세입 구조를 정비하고, 세출을 재구조화하며, 정책의 신뢰성을 높이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유럽이 보여주는 교훈은 단순하다.

    부채의 숫자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정책에 대한 신뢰의 상실, 그리고 미래 세대가 더 이상 정부의 약속을 믿지 않게 되는 순간이다. 유럽의 위기는 경고이자 거울이다. 지금의 한국이 해야 할 일은 그 거울 속에서 자신을 미리 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