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합의 시대, 경계가 사라지는 혁신의 지도
인류의 진보는 늘 ‘분리’에서 시작해 ‘융합’으로 완성되어왔다. 과거에는...


  • 융합의 시대, 경계가 사라지는 혁신의 지도

    인류의 진보는 늘 ‘분리’에서 시작해 ‘융합’으로 완성되어왔다. 과거에는 화학자는 화학만, 생물학자는 생물학만 연구했다. 그러나 오늘의 혁신은 더 이상 학문 안에 갇혀 있지 않다. 과학의 경계가 녹아내리고, 산업의 분할선이 사라지는 지금, 세상은 융합형 혁신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최근 'CAS Insights'가 발표한 「2025 Emerging Trends in Scientific Breakthroughs」 보고서는 이 변화의 핵심 키워드를 분명히 제시한다 — “융합(Fusion)”. 에너지, 생명, 물질, 인공지능, 환경 기술이 얽혀 하나의 복합 생태계를 이루는 현상이다. 이 보고서가 지적하듯, 혁신의 미래는 한 분야의 천재보다 여러 분야의 언어를 동시에 말할 줄 아는 기술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

    에너지의 혁명: 배터리가 아니라 ‘생태계’
    21세기 산업의 혈관은 전기다. 전기차, 스마트폰, 신재생 발전소, 데이터센터까지 — 그 모든 시스템을 움직이는 심장은 바로 배터리다. 그런데 지금의 배터리 산업은 리튬이라는 한 가지 원소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 문제는 그 리튬이 너무 비싸고, 너무 적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포스트 리튬’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나트륨, 칼륨, 마그네슘 같은 흔한 원소를 활용한 차세대 이온 배터리 연구가 빠르게 진전되고 있다. 이 기술의 핵심은 단순히 새로운 원소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재료 과학과 인공지능, 나노엔지니어링이 동시에 협력하는 융합 구조 설계에 있다.

    예컨대 MIT의 한 연구팀은 AI를 이용해 나트륨 기반 전극의 안정성을 시뮬레이션하고, 그 결과를 나노입자 합성 실험에 즉시 반영했다. 과거에는 계산과 실험 사이의 간극이 몇 달이었지만, 이제는 몇 시간 단위로 좁혀지고 있다. 이러한 융합적 접근 덕분에 배터리는 더 오래, 더 안전하게, 더 친환경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배터리는 이제 단순한 저장 장치가 아니라 에너지 생태계의 허브로 기능한다. 전력망, 재생에너지, 전기차, 심지어 가정용 인프라까지 연결하는 ‘지능형 에너지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다. 화학과 물리, 전자공학과 AI, 그리고 환경정책까지 서로 다른 언어가 한 공간에서 대화를 시작했다.

    합성생물학: 생명을 설계하는 시대
    생명은 더 이상 단순히 관찰의 대상이 아니다. 이제 인간은 그것을 설계하고 조합하며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합성생물학(synthetic biology)의 본질이다.

    합성생물학은 생물학, 공학, 컴퓨터과학, 화학이 한데 엮인 융합 분야다. 그 목표는 간단하다 — 자연이 만들어내지 못한 생명 시스템을 설계하고, 인류의 필요에 맞게 조정하는 것. 예컨대 미생물의 유전자를 재조합해 플라스틱을 분해하는 효소를 만들거나, 인간 세포를 수정해 특정 질병을 스스로 치료하도록 하는 연구들이 여기에 속한다.

    2025년, 미국 버클리대와 영국 임페리얼칼리지 공동 연구진은 AI 기반 유전자 조립 플랫폼을 발표했다. 이 시스템은 원하는 단백질의 구조를 입력하면, 가능한 유전자 조합과 합성 경로를 자동으로 제안한다. 과거에는 생명공학자가 실험을 반복하며 수년이 걸리던 과정을 AI가 며칠 만에 끝내는 것이다.

    이런 합성생물학의 응용은 폭넓다. 의료에서는 세포 치료제나 맞춤형 백신 개발에, 산업에서는 바이오 연료와 생분해성 소재 생산에 쓰인다. 한마디로 생명 자체가 ‘공학적 재료’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생명이라는 언어를 다시 쓰고 있다.

    신소재 혁신: 원자와 알고리즘이 만나다
    물질은 세상의 모든 혁신의 토대다. 그러나 신소재의 발견은 늘 느렸다. 실험과 실패가 반복되는, 인내의 과학이었다. 하지만 AI와 양자 시뮬레이션의 등장으로 이 패러다임이 무너지고 있다.

    앞서 구글 딥마인드의 'GNoME' 프로젝트가 보여준 것처럼, 인공지능은 이제 수백만 개의 결정 구조를 스스로 탐색하며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물질”을 찾아낸다. 여기에 양자컴퓨팅 기술이 결합되면, 분자 수준에서의 상호작용 계산이 초고속으로 이루어진다. 이 조합은 단순한 효율 개선이 아니라 “재료 과학의 산업화”를 의미한다.

    새로운 초전도체, 자가 복원형 나노소재, 초경량 전자재료 등은 모두 이러한 융합 연구의 산물이다. 이제 신소재는 단일 연구실의 성과가 아니라, AI + 계산과학 + 실험공학의 공동 창작물이 되고 있다.

    AI와 과학의 융합: 발견의 속도 자체가 변하다
    과학의 속도는 실험의 속도보다 아이디어의 속도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방정식이 바뀌고 있다. AI가 가설을 만들고, 시뮬레이션이 검증하며, 로봇이 실험을 수행한다. 연구자는 그 결과를 해석하고 방향을 조정한다.

    이 구조를 ‘자율적 발견 루프(autonomous discovery loop)’라고 부른다. 배터리, 합성생물학, 신소재, 신약개발 등 모든 영역에서 이 루프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AI가 데이터를 통해 ‘무엇이 가능할지’를 제시하면, 인간은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드는 방법’을 찾아내는 식이다.

    이는 단순히 연구의 효율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철학 자체를 바꾸는 변화다. 과거에는 인간의 직관이 이끌던 과학이 이제는 데이터의 직관, 알고리즘의 통찰을 받아들이고 있다.

    도전과 과제: 통합의 시대가 던지는 질문들
    하지만 융합이 항상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학문 간의 경계가 사라질수록, 윤리와 안전의 경계도 흐려진다. 합성생물학이 생명공학의 혁신을 이끌 수 있는 만큼, 바이오 보안 문제를 키울 수도 있다. AI가 새로운 물질을 설계할 수 있다면, 그것이 군사적·환경적 위험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데이터 주권(data sovereignty)이다. 융합 기술은 대부분 글로벌 협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연구 데이터의 소유권과 활용권이 국가 간 경쟁의 새로운 전장이 되고 있다. 기술보다 데이터가 권력이 되는 시대, “누가 정보를 갖는가”가 “누가 혁신을 주도하는가”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합은 멈출 수 없는 흐름이다. 인류는 늘 분할된 지식의 틀을 넘어, 새로운 통합의 언어를 만들어 왔다.

    미래 시나리오: 인간과 기술의 대화
    결국 융합형 혁신의 본질은 “기술 간의 융합”이 아니라 “인간과 기술의 협업”이다. 인공지능은 방향을 제시하지만, 그 결과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이다. 배터리를 통해 에너지를, 합성생물학을 통해 생명을, 신소재를 통해 문명을 다시 설계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공동 창조자(co-creator)가 된다.

    다가올 10년은 인류가 “분리된 과학의 시대”에서 “대화하는 과학의 시대”로 이동하는 시기다. 연구실과 공장, 데이터와 생명, 원자와 알고리즘이 한 언어로 소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언어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
    “모든 혁신은 혼자 오지 않는다.”

    Reference
    'CAS Insights' (2025). “Scientific Breakthroughs 2025: Emerging Trends to Wa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