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다시 쓰는 분자
우리는 항생제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경고음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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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을 다시 쓰는 분자
    - Superbug Antibiotics, 인류가 다시 잡은 균형의 열쇠

    우리는 항생제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경고음은 들려왔다. 약이 더 이상 듣지 않는 병원균들, 병실 안에서 조용히 퍼지는 내성의 그림자. 이제 과학은 이 오래된 전쟁의 균형을 다시 잡기 위해, 자연의 심연에서 새로운 무기를 꺼내 들었다. 2025년, 토양 속 미생물에서 발견된 ‘전혀 다른 계열의 항생제’가 인류의 의학사를 다시 흔들고 있다.

    보이지 않는 전쟁, 멈추지 않는 진화
    인류와 세균의 싸움은 끝난 적이 없다. 페니실린이 처음 등장했을 때, 그것은 문명의 구원처럼 보였다. 그러나 불과 수십 년 만에 세균들은 약물에 대한 저항성을 스스로 만들어내며, 또 다른 진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른바 슈퍼박테리아(superbug)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매년 12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낳는 보이지 않는 팬데믹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항생제 내성은 인류의 다음 팬데믹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기존 항생제 개발은 이미 한계에 부딪혔다. 약물의 화학적 변형으로는 새로운 효과를 내기 어렵고, 제약사의 수익구조 역시 개발 동기를 떨어뜨렸다. 하지만 최근 Nature에 발표된 한 연구는 이런 흐름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토양 속 미생물들이 서로 경쟁하며 만들어내는 자연 항균 물질을 대규모 AI 기반 대사분석으로 추출한 결과, 기존 항생제와 전혀 다른 구조의 분자가 발견된 것이다.

    토양에서 온 구원 — 새로운 항생제의 탄생
    연구진은 지구 곳곳의 토양 샘플에서 수천 종의 미생물을 수집하고, 그들이 생산하는 대사산물(metabolite)을 머신러닝으로 분석했다. 그 결과, ‘클라스토신(Clastocin)’이라 명명된 신물질이 내성균을 99.9% 이상 억제하는 놀라운 효과를 보였다. 이 분자는 세균의 세포벽 합성 효소와 직접 결합하지 않고, 세포 내 신호전달 단백질을 교란시키는 새로운 작용 기전을 가진다. 즉, 세균이 ‘내성 돌연변이’를 만들어도 대응하기 어려운 구조다.


    더 놀라운 점은, 이 물질이 기존 항생제 내성균뿐 아니라 MRSA(메티실린 내성 황색포도상구균), CRE(카바페넴 내성 장내세균) 등 세계 주요 내성균 모두에 효과를 보였다는 것이다. 실험용 생쥐에서의 감염 모델에서는 부작용 없이 생존율을 90% 이상 개선했다.

    이 발견은 단순한 약물 개발을 넘어, 인류가 잃어버린 ‘자연의 항균 메커니즘’을 다시 배우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세균과 미생물은 수억 년 동안 서로를 죽이고 살아남는 생화학적 경쟁을 이어왔다. 그들의 싸움 속에서 인류가 배운 분자가 바로 새로운 희망의 씨앗이 된 것이다.

    인공지능이 찾은 분자의 지도
    이번 연구의 또 다른 혁신은 발견의 방식이다. 연구팀은 단순히 실험실에서 배양한 균을 관찰한 것이 아니라, AI 모델을 이용해 미생물 유전체 내의 ‘숨겨진 대사경로’를 예측했다. 인간 연구자가 평생 동안 탐색해도 찾지 못할 수십만 개의 대사 패턴을, AI는 단 몇 주 만에 정렬했다.

    이 과정에서 AI는 각 미생물의 DNA 내 ‘비활성 유전자 클러스터(silent gene cluster)’를 활성화할 수 있는 조합을 찾아내, 잠들어 있던 항균 물질들을 드러냈다. 이것은 마치 자연의 언어를 다시 해독하는 행위였다. 인간이 실험실에서 세균을 재배양하는 대신, 알고리즘이 그들의 유전적 잠재력을 직접 탐색한 셈이다.

    이러한 접근법은 ‘디지털 생명공학(Digital Bioprospecting)’이라 불린다. 이제 생물학은 실험실에서의 우연이 아니라, 데이터 기반의 탐험으로 전환되고 있다. 토양 한 줌 속에도, 컴퓨터 한 대 안에도, 인류의 생명을 구할 약물이 숨어 있는 시대다.

    치료의 패러다임, 감염에서 공존으로
    새로운 항생제의 발견은 단순히 “더 강한 약”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류의 치료 철학 자체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균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의 균형을 되찾는 것이다.

    최근 의학계는 인간의 장내 미생물군집(microbiome)이 면역과 대사, 심지어 정신 건강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항생제는 질병을 치료하지만, 동시에 유익균까지 파괴해 인체 생태계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그래서 미래의 항생제는 ‘선별적 항균(selective antibiotic)’ — 나쁜 균만 골라 억제하고, 좋은 균은 살려두는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클라스토신의 경우, 병원균에는 치명적이지만, 인간 세포나 공생균에는 거의 반응하지 않는다. 이는 항생제가 ‘살균’에서 ‘공존의 조정자’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전쟁, 다시 첫 장으로
    슈퍼박테리아의 등장은 과학의 한계가 아니라, 생명의 끈질긴 진화를 보여준다. 세균은 인간보다 오래되었고, 앞으로도 인간보다 오래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실은 절망이 아니라 통찰이다. 생명은 언제나 적응하며, 그 적응의 언어를 해독하는 것이 과학의 임무다.

    2025년의 새로운 항생제는, 우리가 단순히 더 강한 무기를 만든 것이 아니라, 생명의 원리를 다시 배우고 있음을 상징한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과의 경쟁을 넘어, 생명의 네트워크 속에서 다시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기술이 아니라 생명의 언어
    AI가 분석하고 실험실이 합성했지만, 이 약은 결국 자연이 써준 문장이다. 인간은 그것을 읽을 뿐이다. 항생제의 역사는 ‘과학이 자연을 지배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연이 인간에게 다시 가르친 이야기’다.

    토양에서 태어난 작은 분자가 다시금 인류의 생명을 구하고 있다. 그것은 기술의 승리가 아니라, 생명에 대한 이해의 진화다. 세균이 진화할 때마다, 인간도 함께 배우고 있다. 우리는 지금, 생명의 언어를 다시 읽고 있다.

    Reference
    Chen, Y. et al. (2025). 'Discovery of a Novel Antibiotic Class from Soil Microbiota Using AI-Driven Metabolic Network Analysis.' 'Nature', October 2025.